2024년 션 베이커 감독이 만든 〈아노라(Anora)〉는 같은 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감독상·각본상·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화제작이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일하는 한 젊은 여성 아노라가 우연히 만난 러시아 재벌 2세 이반과 짧은 결혼 생활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영화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경계 위에서 빠른 호흡으로 따라간다. 화려한 표면 아래로 한 가지 묵직한 질문이 흐른다. 자기 몸을 자산으로 삼아 신분 상승을 도모한 한 사람의 손에, 마지막에 무엇이 남는가. 이 글에서는 넷플릭스로 본 감상과 함께, 19세기 독일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 개념을 빌려 영화가 던지는 그 질문을 들여다보려 한다.

1. 넷플릭스로 본 아노라 영화 후기
처음 〈아노라〉를 클릭한 동기는 솔직히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칸과 아카데미를 휩쓴 작품이라는 소문 곁에 자극적인 장면이 많다는 후일담이 함께 따라다녔고, 호기심이 결국 그쪽으로 살짝 기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가 한 시간쯤 흐르고 나면 처음의 그 가벼운 호기심은 사라지고, 화면 안에서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한 인물의 표정만 남는다. 영화가 끝났을 때, 왜 이 작품이 그렇게 많은 평단의 찬사를 받았는지 비로소 짐작이 됐다. 아카데미가 손에 쥐여준 상은 자극적인 장면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들 너머에서 끝까지 자기 자리를 잃지 않은 한 캐릭터의 단단함 때문이었다. 마이키 매디슨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2. 아노라의 짧은 신데렐라, 길었던 추락
영화는 한 여성의 짧은 신데렐라 이야기로 시작한다. 뉴욕 브루클린의 한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던 아노라는 우연히 가게에 찾아온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 며칠 만에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즉흥적인 결혼식을 올린다. 호화 저택, 비싼 차,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돈. 모든 풍경이 한순간에 그녀의 손에 들어온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행복은 정확히 결혼 사실이 이반의 부모에게 알려지는 그 순간에 끝난다. 러시아에서 날아온 사람들이 결혼 무효 처리를 위해 그녀를 막무가내로 끌고 다니는 동안, 영화는 점점 한 사람의 짧은 신데렐라가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가까운 거리에서 응시한다. 한순간에 오른 자리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그녀의 손에는 처음 그 자리에 있었던 빈 손바닥만 남는다.

3.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Entfremdung)란
독일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는 1844년에 쓴 초기 저작 《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곤경을 '소외(Entfremdung)'라는 단어로 진단했다. 그가 말한 소외는 단순한 외로움이나 고립감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노동과, 그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과,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과까지 점점 멀어지게 되는 한 가지 구조적인 풍경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몸과 시간을 화폐로 환산해 시장에 내놓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몸과 시간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 시장의 것이 되고, 그가 만들어낸 가치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흘러가 버린다. 마르크스가 평생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이 소외가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구조 그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그늘이라는 사실이었다.
4. 자기 몸을 자산으로 삼아 아메리칸 드림에 도전하다
이 시선으로 〈아노라〉를 다시 들여다보면 영화가 한 개인의 운 없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아노라는 자기 몸을 노동의 자산으로 시장에 내놓고, 그 노동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거머쥐려는 한 사람의 도전을 이어간다. 그녀의 시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적 신화, 즉 아메리칸 드림과 그리 멀지 않다. 매일 노동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잘게 쪼개어 시장에 내놓다 보면, 언젠가 그 노동이 한 번에 보상받는 신분 상승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영화 속 그 짧은 라스베이거스 결혼식은 그녀에게 바로 그 신화가 마침내 실현된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선으로 보면 그 신화 자체가 이미 소외라는 구조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무대였다. 자기 몸을 자산으로 삼아 올라간 자리는 결국 그 자산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순간 함께 무너진다.

5.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깨달음
영화의 마지막 풍경은 의외로 조용하다. 거대한 저택도, 화려한 차도, 그녀에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안겨주었던 한 사람도, 그녀의 손을 잠시 잡았다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사실상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의 그 빈 손바닥뿐이다. 마르크스가 평생 강조한 자본주의의 소외가 가장 잔인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결과를 자기 손에 쥐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노동을 가능하게 했던 자기 자신마저 어느 순간 자기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 마지막 장면 하나에 응축된다. 영화 속 아노라가 끝내 어떤 단단한 표정 하나로 그 자리를 견디는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그 표정이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 가지 진실을 조용히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6.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기 자신을 팔고 있는가
영화관을 나서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질문은 결국 아노라 한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매일 자기 자신의 일부를 시장에 내놓으며 살아간다. 시간을 팔고, 에너지를 팔고, 때로는 표정과 마음의 일부까지도 함께 거래한다. 그렇게 모은 화폐가 언젠가 우리 인생을 한 단계 위로 올려놓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가 매일 아침 집을 나서는 가장 큰 동력이다. 그러나 〈아노라〉가 한 사람의 짧은 신데렐라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매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그 일부가, 어느 순간 우리 자신과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자리까지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멈추어 서 보게 만드는 힘,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