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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 조선판 콘스탄틴, 그리고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의 귀환 공개되자마자 넷플릭스 한국 차트 1위에 오른 동궁을 주말에 몰아 봤다. 8부작 리미티드 시리즈라 호흡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소재가 신선했다. 조선의 궁궐을 배경으로 한 오컬트 사극. 귀의 세계를 넘나드는 능력을 가진 구천과 귀신의 소리를 듣는 궁녀 생강이 왕의 부름을 받아 동궁에 깃든 저주를 파헤친다는 설정이다. 보는 내내 한국판 콘스탄틴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초자연적 존재를 상대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랬다.그런데 이 작품이 단순한 귀신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동궁에 나타나는 저주와 원귀들은 사실 산 자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되기 위한 권력 다툼, 그 다툼에서 밀려나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의 원한. 그 원한이 저주가 되어 궁궐로 돌아온다. 오컬트라는 장르의 .. 2026. 7. 20.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 영화가 역사를 불태울 때, 그리고 벤야민이 말한 구원의 역사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늘 한 가지 기분에 사로잡힌다. 방금 내가 본 것이 영화에 대한 영화, 그러니까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를 향한 한 편의 열렬한 헌사였다는 감각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특히 그렇다. 이 영화는 2차대전이라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역사를 충실히 재현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역사를 통째로 다시 쓴다. 그것도 영화라는 무기를 들고서.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알도 레인 중위와 그가 이끄는 나치 사냥 특공대 바스터즈, 그리고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유대인 소녀 쇼샤나. 이 두 갈래의 이야기가 한 극장에서 만나 폭발하는 그 결말은,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충격적인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 장면에서 히틀러가, 나치 수뇌부 전체가, 한 극장 안에서 .. 2026. 7. 17.
아이 인 더 스카이 — 소녀 한 명과 수십 명의 목숨, 그리고 왈저가 말한 정의로운 전쟁 어떤 영화는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전쟁 영화의 한 정점에 오른다. 아이 인 더 스카이가 그렇다. 이 영화에는 참호도, 돌격도, 장렬한 전사도 없다. 대신 영국의 회의실과 미국의 드론 조종실, 그리고 케냐의 한 골목을 오가며, 단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그 팽팽한 시간만이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질문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이 영화는 숨 막히게 보여준다.이야기는 명료하다. 영국, 미국, 케냐 세 나라가 오랫동안 추적해온 테러 조직을 드론으로 제거하려 한다. 그런데 감시 드론이 포착한 영상 속에서, 이 조직이 자살 폭탄 테러를 준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생포 작전은 즉시 사살 작전으로 바뀐다. 그러나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순간.. 2026. 7. 14.
토이 스토리 5 — 릴리패드에 빼앗긴 마음, 그리고 한병철이 말한 주의의 위기 토이 스토리는 나에게 단순한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아니다. 1편이 나온 지 30년이 넘었고, 그 긴 시간 동안 이 시리즈는 장난감이라는 소재를 빌려 우정과 성장, 그리고 이별에 대한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이야기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와 함께 한 가지 걱정도 있었다. 3편의 그 완벽한 이별과 4편의 담담한 마무리 뒤에, 과연 이 시리즈가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극장에서 토이 스토리 5를 보고 나서, 그 걱정은 사라졌다. 이 영화는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한 가지 질문을 정확히 던진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밀어내고 있는가. 장난감들의 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번에는 사악한 악당도, 시간의 흐름도 아니.. 2026. 7. 12.
시크릿 에이전트 — 반어법의 제목, 그리고 리쾨르가 말한 기억의 의무 어떤 영화는 제목이 곧 한 편의 반어법이다.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렇다. 이 제목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화려한 첩보 액션을 떠올린다. 비밀 요원, 총격전, 음모와 반전. 그러나 브라질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그 모든 기대를 정면으로 배신한다. 여기에는 멋진 스파이도, 통쾌한 액션도 없다. 대신 한 시대의 서늘한 공기가, 그 시대를 살아낸 한 남자의 침묵이 두 시간 반 내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제목이 반어법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첩보 요원이 아니라, 그저 자기 이름을 숨긴 채 살아남아야 했던 한 평범한 인간이다. 그가 비밀요원처럼 이름을 버리고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은 어떤 화려한 임무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시크릿 에이전트.. 2026. 7. 10.
나홍진 스페셜 ③ 곡성 — 증거 없이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 나홍진 감독 스페셜의 마지막으로, 그의 세계가 도달한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을 꺼낸다. 곡성이다. 2016년에 나온 이 작품은 개봉 이후 지금까지도 해석이 끊이지 않는다. 누가 악마인가, 무명은 무엇인가, 결말은 무슨 뜻인가. 감독 자신이 "범인은 명쾌하지만 해설은 자유롭다"고 말했을 만큼, 이 영화는 관객마다 다른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지난번 추격자를 다룰 때, 나홍진 감독이 부조리한 세계를 그린다고 적었다. 곡성은 그 부조리를 신과 믿음의 영역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추격자의 세계가 법과 정의가 무력한 곳이었다면, 곡성의 세계는 아예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세계 한가운데에서, 한 아버지가 딸을 살리기 위해 한 가지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 2026.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