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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 1979년 12월의 그 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오랜만에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를 보았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 한밤중에 한국 현대사의 한 큰 흐름이 결정적으로 굳어지던 그 풍경을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안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영화를 보기 전부터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그런데 영화는 그 분명한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미 닫혀 있는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질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1979년 12월의 그 한밤영화의 무대는 1979년 12월 12일의 밤이.. 2026. 6. 9.
참교육 — 사이다의 정체, 그리고 푸코가 말한 사라진 처벌의 스펙터클 주말 내내 한 드라마를 다 본 적이 오랜만이다. 그것도 한 번에 다 푸는 OTT 시리즈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서, 토요일 오후에 시작해 일요일 밤까지 10화를 거의 다 봤다. 넷플릭스의 신작 참교육이다.다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사이다. 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 있었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통쾌하게 한 방씩 날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그래, 그렇지!"라는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우리는 왜 이런 식의 이야기 앞에서 이렇게 시원해할까. 정말로 한국 사회에 교권보호국 같은 기관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그 시원함의 진짜 정체일까.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가 1975년에 쓴 한 권의 책이 .. 2026. 6. 8.
하얼빈 — 안중근의 그릇, 그리고 맹자가 말한 대장부 오랜만에 한국 사극을 봤다. 그것도 안중근이라는,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한 영웅의 이야기다. 현빈이 안중근 역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막상 영화를 본 뒤에는 그 캐스팅이 정말 잘 어울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일어난 그 결정적인 한 발의 총성도 아니었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어떤 액션 장면도 아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비추는 한 장면, 그러니까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는 그 짧은 한 결정이었다.신아산의 전투, 그리고 한 사람의 결정영화 초반에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 2026. 6. 7.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영화 앞에서 잠든 한 관객, 그리고 손택의 시선 이번 글은 좀 다른 결로 시작해야겠다. 솔직히 말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면서 영화 중간에 잠이 들었다.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작품이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라기에 Wavve에서 돈까지 주고 본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가장 먼저 떠오른 한 마디는 단 한 줄이었다. "내가 영화를 볼 줄 모르는 건가?"그래서 이번 글은 칭찬보다는 의문에 가깝다. 평론가가 극찬하고 한 관객은 잠들었다면, 그 영화에 대한 진짜 평가는 어느 쪽인가. 수전 손택이라는 한 비평가의 시선을 빌리면 이 의문에 한 가지 답을 받을 수 있다.평론가는 극찬했고, 나는 잠들었다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25년 신작이다. 한물간 혁명가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16년 만에 .. 2026. 6. 5.
바람의 검심 — 켄신의 신념은 자기 합리화인가, 진짜 속죄인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옮기는 일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 작업이다. 원작 팬의 마음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매체의 문법으로 다시 짜내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 중에도 "이건 잘 풀렸다"라고 단연 손꼽을 만한 작품이 한 편 있다. 바람의 검심이다.검술 액션 장면들의 완성도, 사토 타케루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일본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 초기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화면 안에 풀어 놓는 미장센까지, 어느 자리 하나 빠질 데가 없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액션도 미장센도 아니다. 한 인물의 신념 한 줄이다.살인귀에서 떠돌이 검객으로영화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본래 막부 말기 조슈번 소속의 자객이었다. 도막파의 그림자 안에서 .. 2026. 6. 4.
골드랜드 — 김희주의 흑화, 그리고 짐멜이 말한 돈의 진짜 무게 평소에는 영화를 주로 보지만, 가끔 OTT의 짧은 시리즈에 손이 가는 날이 있다. 디즈니+의 골드랜드도 그렇게 만난 작품이다. 10부작이라는 분량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박보영이 사랑스러운 이미지 위에 다른 결을 한 번 그려본다는 사실이 호기심을 끌었다.10화를 다 본 끝에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김희주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손에 쥐었고,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프랑스 남부의 한 풍경 안에 마침내 머물게 되었는데, 그 표정 어디에도 평온이 보이지 않았다. 1,500억 원이라는 한 덩어리의 금이 한 사람의 일상을 어디까지 갈아내릴 수 있는가, 골드랜드가 10화 동안 보여주려 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다.김희주, 돈이 한 사람을 갈아내리는 속도골드랜드의 주인공 김희주(박보영)는.. 2026.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