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가 천만 명을 모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2003년의 한국은 실미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긴 이 영화는 단순한 흥행 기록을 넘어,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정면으로 끌어올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실미도는 1968년에 창설되었던 한 비밀 부대, 흔히 684부대라 불리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무겁다.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그 비극이 누군가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한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사실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가슴에 남는다. 국가가 한 무리의 인간을 만들어내고, 쓰고, 끝내 지워버린 그 이야기.

만들어지고 버려진 사람들
영화의 시작은 한 가지 모집에서 출발한다. 사형수와 무기수, 그러니까 사회에서 이미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북파 공작원이 되어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약속. 죽음을 앞둔 그들에게 그것은 마지막 한 가닥 희망처럼 보인다. 그렇게 그들은 실미도라는 외딴섬으로 보내져,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한 사람 한 사람 국가의 비밀 병기로 만들어진다.
영화가 깊은 곳을 건드리는 지점은 이 부대원들이 점점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처음에는 그저 살기 위해 모인 범죄자들이었지만, 함께 견딘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그들 사이에 전우애가 자라나고, 자기들도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한 가지 자긍심이 생겨난다. 그들은 자기들을 만들어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시대가 바뀐다. 남북 관계의 정세가 변하면서 그들의 임무는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국가에 부담이 된다. 한때 비밀 병기로 만들어졌던 그들은 이제 비밀스럽게 지워져야 할 흔적이 되어버린다. 만들어준 그 손이, 이제 그들을 없애려 한다.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
이 비극의 정체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한 가지 개념이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1995년에 펴낸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다듬은 그 이름이다.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법에 등장하는 한 기묘한 존재인데, 그 뜻을 풀면 이렇다. 죽여도 그를 죽인 자가 처벌받지 않지만, 동시에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쓸 수도 없는 존재. 그러니까 법의 보호 바깥으로 완전히 추방되어, 누구든 그를 해쳐도 되는 그런 자리에 놓인 인간이다.
아감벤이 이 오래된 개념을 다시 꺼낸 이유가 있다. 그는 호모 사케르야말로 근대 국가 권력의 가장 깊은 비밀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보았다. 국가는 한편으로 시민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권력의 밑바닥에는 언제든 한 인간을 법의 보호 바깥으로 추방하여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자리한다. 아감벤은 그렇게 모든 법적, 정치적 보호가 벗겨진 채 오직 권력에 완전히 노출된 생명을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 불렀다. 호모 사케르는 바로 그 벌거벗은 생명의 화신이다.
실미도의 684부대원들이 정확히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 즉 사형수와 무기수였다. 법은 이미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상태였다. 국가는 그 법의 경계선 위에 선 사람들을 데려다가, 법의 정상적인 절차 바깥에서 비밀리에 한 가지 도구로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군인으로서의 정식 신분도,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 권력에 완전히 노출된 채, 오직 그 권력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쓰이고 버려질 수 있는 벌거벗은 생명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자리에서도 같은 사상가의 시선을 빌린 적이 있다. 서울의 봄을 보고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을 빌려 적은 글이 있다. 흥미롭게도 아감벤에게 예외상태와 호모 사케르는 한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일상의 법질서가 정지되는 예외상태, 그리고 그 정지된 자리에서 한 인간이 모든 보호를 잃고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하는 호모 사케르. 서울의 봄이 그 예외상태의 정치를 보여줬다면, 실미도는 그 예외상태가 한 인간을 어떻게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한국 현대사라는 같은 무대 위에서 아감벤의 두 개념이 각각 한 편의 영화로 살아 움직이는 셈이다.
그들이 끝내 외친 이름들
영화의 마지막, 자기들을 버린 국가를 향해 부대원들이 마지막 저항에 나서는 그 장면을 떠올려본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그 처절한 마지막 행동. 그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들도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 인간이라는 사실을, 지워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세상에 증언하려는 한 가지 절규였다.
아감벤의 시선에서 보면 그 마지막 저항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져 조용히 지워질 운명이었던 그들이, 자기 존재를 끝내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 마지막 몸부림. 그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려 했다. 자기들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고 어떻게 버려졌는지를, 침묵 속에 묻히지 않게 하려는 그 한 가지 절박함. 영화가 천만 명의 가슴을 울린 진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관객들은 그 스크린 위에서, 국가에 의해 지워질 뻔했던 한 무리의 인간이 끝내 자기 존재를 증언하는 그 순간을 함께 목격한 것이다.
묻혀 있던 이야기를 끌어올린다는 것
실미도가 단순한 흥행작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영화가 오랫동안 국가가 묻어두려 했던 한 이야기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올렸다는 데에 있다. 실제 684부대의 진실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이 영화는 그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져 지워질 뻔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만 명이 함께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좋은 영화는 단지 두 시간의 오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로 한 편의 영화는 한 시대가 묻어두려 했던 진실을 다시 끌어올려, 우리가 외면했던 한 가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실미도가 그런 영화였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쉽게 벌거벗겨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지워질 뻔한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 마음에 남는 그 무거움은, 그 질문이 아직 우리에게 끝나지 않은 한 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