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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 1979년 12월의 그 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by Life philosophy 2026. 6. 9.

오랜만에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를 보았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 한밤중에 한국 현대사의 한 큰 흐름이 결정적으로 굳어지던 그 풍경을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안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그런데 영화는 그 분명한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미 닫혀 있는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질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1979년 12월의 그 한밤

영화의 무대는 1979년 12월 12일의 밤이다. 그해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시해된 직후, 한국은 비상계엄 아래 놓여 있었다. 분명한 후계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한 시대가 닫히고 다음 시대가 아직 열리지 않은 그 짧은 공백의 시간. 그 공백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채울 것인가를 두고 한 군부 내의 한 무리가 한밤중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극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다. 황정민이 연기한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그 공백을 자기 손으로 한 번에 닫아버리려는 결단을 내리고, 정우성이 연기한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은 그 결단을 끝까지 막아내려고 한다. 한 사람은 권력을 자기 손에 가져오려 하고, 또 한 사람은 한 군인의 본분에 끝까지 충실하려 한다. 그날 밤 서울의 한 시청 앞 광장에서 두 인물이 마주 서는 한 장면을 위해 영화는 두 시간을 천천히 쌓아 올린다.

영화가 가장 잘 그려낸 것 한 가지는 그날 밤의 혼란이었다. 한 명의 군 총사령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누가 어떤 명령을 누구에게 내리고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한밤의 풍경. 한 군의 지휘 체계 전체가 일순간에 흔들리고, 한 무리가 그 흔들림 위에 자기 결단을 새로 얹어 놓는 그 한가운데. 영화는 그 풍경을 거의 한 컷도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결과를 알고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의 정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그 밤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알고 있다. 누가 승리했고 누가 무너졌는지,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80년대로 들어섰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영화 한가운데서 우리는 손에 땀을 쥔다. 이태신이 한 통의 전화를 잡을 때, 전두광이 한 명령서를 내릴 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결말 앞에서도 이번에는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한 감각에 매번 다시 휘말린다.

이 손에 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의 연출력 때문만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이라면 어떤 잘 만든 역사 드라마도 이 정도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봄이 다른 한 가지를 더 들려주는 이유는, 그날 밤 한국 현대사가 분명히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을 영화가 끝까지 짚어 내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흐름은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몇 명이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분명히 다르게 닫힐 수도 있었다.

이 한 가지 통찰 앞에서 한 명의 이탈리아 철학자가 떠오른다.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2003년에 펴낸 《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에서 현대 정치의 한 깊은 비밀을 짚어 낸다. 우리는 보통 한 사회의 법질서가 일상의 흐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감벤이 보기에 현대 정치의 진짜 모습은 그 일상의 흐름 안이 아니라, 그 흐름이 한 번에 정지되는 짧은 한 순간에 있다. 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 한 사회가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서 평소의 법질서를 잠시 정지시키고, 한 명 또는 한 무리의 결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그 짧은 공백의 시간이다.

아감벤의 한 핵심 통찰은 이것이다. 한 사회의 진짜 권력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그 예외상태 안에서야 비로소 자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누가 그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가, 누가 그 안에서 결단할 수 있는가가 한 사회의 진짜 주권자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평소의 법은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한 가지 공백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서울의 봄이 그리는 1979년 12월의 그 밤은 정확히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였다. 박정희가 시해되며 한국이라는 한 사회의 일상적 법질서가 한 차례 정지되었고, 그 정지된 한 순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이라는 한국식 용어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다. 그리고 그 예외상태 안에서 한 무리가 자기 결단으로 한 사회의 다음 50년을 한 번에 결정했다.

여기서 아감벤의 시선이 한 가지를 더 알려준다. 그날 밤 일어난 일은 평소의 법으로는 분명히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그 순간은 평소의 법이 정지된 예외상태였고, 그 안에서 한 무리가 결단하여 새로운 법질서의 시작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만든 새로운 법이 그 행위를 사후적으로 합법화했다. 한 국가의 정초적 폭력이 어떻게 합법성을 가장하여 들어오는가를, 그날 밤은 거의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영화가 결과를 알고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 예외상태의 한 순간이 어느 방향으로도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신이 한 통의 전화를 더 받았더라면, 한 부대의 지휘관이 한 번 더 망설였더라면, 그 예외상태 안에서 다른 결단이 만들어졌더라면 한국은 분명히 다른 80년대로 들어섰을 것이다. 그 가능성이 영화의 매 장면 안쪽에서 끊임없이 떨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를 알고도 그 밤이 처음 펼쳐지는 것처럼 긴장한다.

한국 현대사의 두 개의 12월

그리고 영화가 한 가지를 더 우리에게 묻는다. 그날 밤의 예외상태가 마지막이었는가. 한국 현대사는 그 12월 이후로 다시는 같은 종류의 한 풍경에 서지 않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예전에 12.3 비상계엄을 다룬 영화 한 편을 보고 한나 아렌트의 시민 권력 개념을 빌려 적은 글이 있다. 한국 현대사는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또 한 번의 12월을 마주했다. 1979년의 12.12와 2024년의 12.3. 두 12월 사이에는 거의 정확히 반세기의 시간이 놓여 있지만, 그 두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일의 결은 놀라울 만큼 같다. 일상의 법질서가 한 차례 정지되고, 그 정지된 한 자리에서 한 무리가 자기 결단으로 한 사회의 다음을 결정하려 한다는 것.

다만 두 12월의 마지막 한 컷은 분명히 달랐다. 첫 번째 12월의 그 한 밤은 한 무리의 결단으로 닫혔지만, 두 번째 12월의 그 한 밤은 시민의 한 결단으로 닫혔다. 한국이 반세기 동안 천천히 무엇을 배웠는가가 그 한 컷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예외상태가 다시 한국에 찾아왔을 때, 그 안에서 결단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위치에 이번에는 한 무리의 시민이 함께 섰다.

그래도 다시 마주해야 하는 한 밤

서울의 봄을 다시 누르게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영화는 단순히 지난 한 시대의 한 사건을 박물관 같은 위치에 모셔두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가 매번 다시 들려주는 한 줄은, 어떤 한 사회의 진짜 모습은 평소가 아니라 그 평소가 한 번 정지되는 짧은 한 순간에서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누가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그 사회의 다음 한 세대 전체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손에 땀이 흐르는 그 감각의 진짜 정체는 1979년의 한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직감이다. 다시 한 번 그런 한 밤이 우리 앞에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디에 서서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영화가 끝까지 묻고 있는 한 줄이 결국 그 한 가지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