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짜가 나에게 그런 영화다. 정확히 몇 번을 봤는지 이제는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고, 웬만한 대사는 그냥 줄줄 외운다.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도 지금 어떤 장면이 지나가고 있는지 다 안다. 최동훈 감독의 여러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짜는 단연 으뜸의 자리에 있다.
언젠가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가. 처음 떠오른 답은 단순했다. 도박으로 돈을 따는 그 짜릿함, 화투패가 뒤집히는 한 순간에 분출되는 도파민. 분명히 그 재미가 영화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스무 번을 넘게 보면서 그 답은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내가 이 영화를 이토록 오래 곁에 두는 진짜 이유는 도박의 짜릿함이 아니라, 고니라는 한 인간이 그 도박판을 통과하며 어떤 사람으로 변해 가는가에 있었다.

도박판이라는 무대, 그 위의 한 인간
타짜는 표면적으로 도박 영화다. 평범한 공장 노동자였던 고니가 도박에 빠져 모든 것을 잃고, 전설적인 타짜 평경장을 만나 화투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펼쳐지는 한 인간의 이야기. 정 마담, 아귀, 고광렬 같은 그 세계의 인물들이 고니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속고 속이는 한 판의 풍경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룬다.
그러나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면 분명해지는 한 가지가 있다. 이 영화의 진짜 무대는 화투판이 아니라 고니라는 한 인간의 내면이다. 영화는 한 판의 도박이 끝날 때마다 고니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를 보여주는데, 그가 잃는 것은 단지 돈이 아니다. 그는 매 판마다 자기 자신의 한 조각을 걸고, 그 판이 끝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화투패가 뒤집히는 그 한 순간들이 사실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한 판의 내기였던 셈이다.
고니라는 인물에게서 가장 인상적인 한 가지는 그 특유의 자유로운 느낌이다. 그는 어디에도 완전히 매이지 않는다. 한 자리에 정착하기보다 다음 판으로, 다음 도시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 떠도는 자유로움이 도박이라는 위험한 세계 안에서도 그를 묘하게 살아 있게 만든다.
비슷한 결의 인물을 다른 영화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F1 더 무비를 보고 들뢰즈의 유목민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다음 서킷으로 끊임없이 떠도는 한 남자 소니를 다룬 적이 있다. 고니와 소니는 무대만 다를 뿐 같은 결을 가진 인물이다. 한쪽은 서킷을, 다른 한쪽은 도박판을 떠돈다. 두 인물의 그 자유로움에 내가 그토록 끌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내가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삶의 한 풍경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파스칼, 도박에서 시작해 인생에 닿은 한 사람
타짜를 인생에 대한 한 편의 비유로 읽기 시작하면, 한 명의 프랑스 사상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블레즈 파스칼이다. 흥미롭게도 파스칼은 근대 확률론을 처음 연 사람 중 하나이고, 그 확률론은 다름 아닌 도박 문제에서 출발했다. 한 판의 내기가 중간에 끝났을 때 판돈을 어떻게 나눠야 공정한가, 라는 도박꾼들의 한 질문에 수학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확률이라는 개념의 한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파스칼이 진짜로 깊이 들여다본 것은 화투패나 주사위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한 판의 거대한 내기로 보았다. 그가 남긴 글 모음 《팡세(Pensées)》에서 파스칼은 한 가지를 끈질기게 짚는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근본적인 불확실함과 공허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끝내 알 수 없는 한가운데에 던져져 있고, 그 공허를 직시하는 일은 너무나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한 가지 길을 택한다. 파스칼은 그것을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이라 불렀다. 우리말로는 위락 또는 기분전환으로 옮길 수 있는 이 단어를, 파스칼은 인간이 자기 실존의 공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에 자기를 몰입시키는 그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사냥, 놀이, 그리고 무엇보다 도박. 인간이 도박판에 그토록 빠져드는 이유는 사실 돈 때문이 아니라고 파스칼은 말한다. 그 한 판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몰입이, 자기 실존의 공허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타짜의 도박판이 정확히 파스칼이 말한 그 디베르티스망의 무대다. 영화 속 인물들이 화투판에 모든 것을 거는 이유는 단지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한 판의 긴장 안에서만 그들은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 몰입 안에서만 자기 삶의 공허를 잊는다. 영화가 도박을 단순한 오락으로만 그리지 않고 한 인간의 실존이 걸린 무대로 그려내는 그 깊이가, 내가 이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보면서도 매번 새롭게 느끼는 한 가지다.
인생이라는 한 판의 내기
그런데 파스칼의 시선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인간의 삶을 한 판의 내기로 보았다면, 그 내기에서 인간은 무엇에 베팅해야 하는가. 파스칼 자신은 그 베팅의 대상으로 한 가지 깊은 답을 내놓았지만, 그 종교적 결론까지 따라가지 않더라도 그의 통찰에는 한 가지 보편적인 한 줄이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불확실한 한 판 위에서, 무언가에 자기 전부를 걸며 살아간다는 것.
타짜의 고니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것이 정확히 그 풍경이다. 그는 화투판에 돈을 걸지만, 사실 그가 매번 거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한 인생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까지 따라가는 것은 그가 그 거듭된 내기 끝에 어떤 사람이 되는가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고니는 처음의 그 순진한 청년과는 분명히 다른 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가 도박판에서 잃고 얻은 모든 것이 결국 한 인간의 내면을 빚어낸 한 판의 긴 내기였던 셈이다.
내가 이 영화를 인생에 대한 한 편의 비유로 읽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도박판 위에 서 있다. 무엇에 자기를 걸 것인가, 그 베팅의 결과를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리고 그 거듭된 판 끝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타짜는 화투패라는 그 화려한 무대를 빌려, 사실은 그 한 줄짜리 질문을 끝까지 들려주고 있었다.
스물한 번째, 그리고 그 다음
타짜2도 타짜3도 다 보았다. 분명히 각자의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지만, 최동훈 감독의 그 첫 번째 타짜와 감히 같은 자리에 놓을 수는 없다. 첫 번째 타짜에만 있는 그 한 가지, 그러니까 화려한 도박의 무대 뒤편에서 한 인간의 내면을 끝까지 따라가는 그 깊이가 다른 작품들에는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또 한 번 이 영화를 누르게 될 것이다. 스물한 번째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스물두 번째일 것이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 대사를 다 외우고 있으면서도 처음 보는 것처럼 다시 빠져들 것이다. 좋은 영화는 그 결말을 다 알고 대사를 다 외운 뒤에도 매번 다시 새로워진다. 나에게 타짜는 분명히 그런 영화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볼 때마다, 내가 지금 어떤 판 위에 서 있고 무엇에 나를 걸고 있는가를 한 번씩 다시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