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영화를 열 번씩 보는 일은 사실 흔치 않다. 그런데 F1 더 무비는 그렇게 본 영화다. 처음 본 뒤 며칠 만에 한 번 더, 그러다 출근길에 OST를 듣다 또 한 번, 주말마다 한 번씩, 그렇게 모르는 사이에 열 번이 넘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박힌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소니라는 한 남자, 다른 하나는 F1이라는 무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얹혔다. 소니가 살아가는 방식,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다음 서킷으로 또 그다음 서킷으로 떠도는 그 삶이, 어쩌면 내가 평생 꿈꿔온 풍경에 가장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브래드 피트의 소니, 가슴이 울리는 한 남자
원래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 자체를 좋아한다. 그런데 F1에서 그가 그려낸 소니 헤이즈는 그를 좋아하던 이유 위에 새로운 한 줄을 더 얹어준 캐릭터였다. 전성기 시절 큰 사고로 F1을 떠나야 했던 베테랑이 수십 년 뒤 다시 그 무대로 돌아온다는 설정. 클리셰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브래드 피트가 그저 자기 얼굴 한 컷으로 다 설명해버린다.
소니의 표정에는 어떤 종류의 감상도 없다. 한이 서린 눈도 아니고, 복수를 다짐하는 결연한 눈도 아니다. 그저 다시 돌아왔으니 한 번 더 해보겠다는, 묘하게 비어 있고 묘하게 단단한 눈이다. 그 한 컷 안에 한 남자가 살아온 수십 년이 통째로 들어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화면 안에서는 분명하게 보이는 것, 그것이 좋은 배우의 얼굴이다.
그리고 F1이라는 무대 자체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코너를 도는 차의 진동, 엔진이 만들어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 그리고 그 위에 얹히는 한스 짐머의 굵은 저음. 영화관 좌석에 앉아 그 화면을 마주하고 있으면 평소에는 잘 안 쓰이는 가슴 한구석의 어떤 근육이 자기도 모르게 떨려온다. 이게 정확히 무엇이라고 설명하긴 어려운데, 분명히 거기에 있다.
화면, 그리고 음향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탑건 매버릭에서 이미 보여줬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만 받을 수 있는 압도적인 감각이 어떤 것인지. F1 더 무비는 그것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실제 F1 그랑프리 주말에 같은 서킷에 카메라를 들여놓고 같은 속도로 달려가며 찍은 화면. CG로 흉내 낸 속도감과 진짜로 그 자리에 있던 카메라의 화면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한스 짐머가 깔아주는 음악이 만나면, 영화 한 편이 두 시간 동안 사람의 모든 감각을 빈틈없이 채워낸다. 그래서 같은 영화를 열 번씩 보게 된다. 매번 같은 장면이라도 그 진동과 그 음향이 들려주는 무언가는 단 한 번도 같지 않다.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삶, 들뢰즈의 유목민
영화를 다시 보고 또다시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소니의 레이싱 장면보다 그가 한 서킷에서 다른 서킷으로 이동하는 짧은 컷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기 시작했다. 자기 짐을 챙겨 다음 도시로, 다음 나라로, 다음 트랙으로 떠나는 한 남자. 그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경이 쓸쓸해 보이기는커녕 묘하게 자유로워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동료 가타리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에서 인간의 두 가지 삶의 양식을 대비했다. 한쪽은 정착민의 삶이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분할하고 측량하며 살아가는 삶. 다른 한쪽은 유목민(nomade)의 삶이다. 정해진 출발지도 도착지도 없이, 그저 풀이 자라는 곳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삶. 들뢰즈가 보기에 유목민은 단순히 떠돌아다니는 자가 아니다. 한 곳에 매이지 않음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자기로 되어가는, 가장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다.
소니의 삶이 정확히 그 모습이다. 그에게는 정해진 집도 정해진 가족도 정해진 미래도 없다. 다음 시즌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 다음 사고가 그의 커리어를 어디서 끝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불확실함 안에서 그는 매번 새로운 자기로 다시 태어난다. 어제의 서킷에서의 그와 오늘의 서킷에서의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이 그를 지치지 않게 만드는 진짜 동력이다.
영화를 보면서 자꾸 나 자신을 그 자리에 겹쳐 보게 된다. 매일 같은 출근길, 매일 같은 사무실, 매일 같은 미팅. 그 모든 것이 분명히 나의 안정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 안정이 나에게서 무엇을 천천히 빼앗고 있는지도 안다. 소니의 떠도는 삶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결국 들뢰즈가 말한 그 자유의 한 풍경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죽음의 경계에서 사는 남자라는 모티프에 관해서는 예전에 폭풍 속으로의 보디를 보고 니체의 위버멘쉬를 빌려 적은 글이 있다. 보디가 파도라는 매끄러운 공간 위를 떠도는 인물이었다면, 소니는 서킷이라는 매끄러운 공간을 떠도는 인물이다. 시대도 다르고 무대도 다르지만, 두 영화가 끝내 그리는 한 인간의 풍경은 묘하게 닮아 있다.
다시 또 한 번 볼 것이다
F1 더 무비는 분명히 또 한 번 보게 될 것이다. 다음에는 열한 번째일 것이고, 그다음에는 열두 번째일 것이다. 매번 같은 화면이지만 매번 다른 무엇이 가슴 한구석을 건드릴 것이다. 어떤 날은 브래드 피트의 한 컷이, 어떤 날은 엔진 소리가, 또 어떤 날은 다음 도시로 떠나는 소니의 뒷모습이.
누군가에게 영화는 그저 두 시간의 오락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기가 살고 싶은 인생의 한 풍경을 잠시나마 빌려 살아보는 시간이다. 나에게 F1 더 무비는 분명히 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