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평론과 분명히 다른 결로 한 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있다. 모두가 별로라고 입을 모으는 영화가 한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들어오는 경우. 전지적 독자 시점이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8억 뷰의 웹소설 원작이고, 거대한 팬덤이 있었고, 그래서 영화화 소식부터 기대와 우려가 컸던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오자 평단도 원작 팬도 거의 한목소리로 실망을 토로했다. 평점이 떨어지고, 후기마다 각색의 어색함과 CG의 미흡함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나는 의외로 재미있게 봤다.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원작 웹소설도 웹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펼쳐지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 채로, 그저 한 편의 한국 판타지 액션 영화를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다. 그 한가운데서 본 전지적 독자 시점은, 분명히 완벽한 걸작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편의 영화로서 두 시간을 채워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 한 가지 경험이 한참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같은 영화를 두고 누군가는 형편없다 말하고, 누군가는 의외로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독일의 한 문학이론가가 1960년대에 다듬은 한 가지 개념이 그 질문에 깔끔한 답을 내어 준다.

평론은 혹평이었고 나는 재미있게 봤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2025년 7월 23일에 개봉한 김병우 감독의 한국 판타지 액션 영화다. 더 테러 라이브로 한정된 공간 안의 긴장을 누구보다 잘 만들어내던 그 감독이 8억 뷰의 웹소설을 영화로 옮긴다고 했을 때, 원작 팬들의 기대도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10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평점은 떨어졌고 후기는 차가워졌다.
가장 많이 지적된 한 가지는 각색의 아쉬움이었다. 원작의 김독자가 가졌던 그 특유의 결, 그러니까 정보 우위 위에서의 여유와 계산적이면서도 희생주의적인 복합적 캐릭터성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는 평이다. CG의 완성도 역시 300억의 제작비에 비해 기대 이하라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영화관에 앉아 그 두 시간을 처음 마주한 한 관객으로서 나는 다른 한 가지를 받았다. 어느 날 평범한 한 회사원의 일상이 갑자기 자기 혼자만 끝까지 읽은 한 편의 소설 속 세계로 바뀐다는 한 가지 설정. 화면 속 김독자가 자기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채로 동료들과 함께 헤쳐 나가는 그 풍경. 안효섭의 김독자, 이민호의 유중혁이 만들어내는 한 호흡의 액션. 이 모든 것이 영화관 의자에 앉은 한 관객에게는 충분히 재미있는 두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인터넷에서 후기를 찾아보다가 잠깐 멍해졌다. 같은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이렇게 다르게 보는구나, 라는 가장 단순한 한 사실 앞에서.
혼자만 결말을 아는 주인공이라는 한 가지 설정
전지적 독자 시점이 한 영화로서 들려주는 가장 매력적인 한 줄은 분명히 그 설정 자체다. 한 사람이 10년 동안 혼자 읽어 온 웹소설의 마지막 회가 올라온 날, 그 소설 안의 세계가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 소설을 끝까지 읽은 유일한 독자가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그 새로 펼쳐진 세계의 가장 큰 정보 우위자로 만든다. 다음 무엇이 일어날지, 누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아남는지, 마지막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를 그 혼자만 알고 있다.
이 설정 앞에서 한 가지 환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나 혼자만 미리 알고 있다면. 이 환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 봤을 보편적인 한 가지다. 영화는 그 환상을 본격적으로 한 편의 화면으로 풀어내는 데에 분명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원작을 끝까지 읽은 팬들의 입장에서는 이 환상의 결이 다르게 다가왔을 수 있다. 그들에게 김독자는 이미 자기 마음 안에 분명한 한 인물로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이고, 그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그려지느냐가 영화의 모든 평가를 결정짓는 한 가지 기준이 된다. 그러나 그 인물을 처음 만나는 관객에게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영화 안의 김독자가 그 자리를 그대로 채워 들어올 수 있다. 같은 영화 한 편 앞에서 두 종류의 관객이 정반대의 결을 받는 이유가 정확히 거기에 있다.
야우스가 말한 기대 지평
독일의 문학이론가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1960년대 후반 콘스탄츠 대학에서 한 가지 큰 전환을 만들어냈다. 그때까지의 문학 이론은 한 작품을 그 작품 안쪽에서만 들여다보거나, 그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의도로부터 분석하는 데에 익숙했다. 야우스는 그 시선을 한 번 더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작품의 의미는 작품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의미는 작품과 그 작품을 마주하는 한 독자가 만나는 한가운데서야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야우스의 가장 유명한 한 개념이 거기서 나온다. 기대 지평(Erwartungshorizont). 한 독자가 한 작품을 마주할 때, 그는 결코 빈 마음으로 그 작품 앞에 서지 않는다. 그 독자가 이전에 읽었던 다른 작품들의 경험, 그 작품의 장르에 대한 그의 사전 지식, 그 작품에 대해 들었던 다른 사람들의 평가, 그 작품이 속한 시대와 문화에 대한 이해. 이 모든 것이 그 독자의 마음 안쪽에 한 가지 지평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 지평이 그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관객이 영화관 의자에 앉을 때, 그의 마음 안쪽에는 그 영화에 대한 그만의 한 지평이 이미 들어 있다. 8억 뷰 웹소설의 결말을 끝까지 알고 있는 팬의 지평과, 그 웹소설의 존재만 어렴풋이 들어 본 한 관객의 지평은 분명히 다른 풍경이다. 같은 영화가 같은 화면 위에 펼쳐져도, 그 영화가 닿는 두 사람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받는 영화는 사실상 다른 영화가 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극단적으로 갈렸던 진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원작을 끝까지 본 팬의 기대 지평에는 김독자라는 인물이 어떤 결로 그려져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한 그림이 들어 있었고, 영화는 그 그림과 분명히 어긋나는 다른 그림을 화면 위에 그려 보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화는 어긋난 작품이었다. 그러나 원작을 본 적 없는 관객의 지평에는 그 그림 자체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빈 지평 위에 영화가 그려 보인 그림은 그저 그 자체로 한 편의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화는 충분히 즐길 만한 한 편이 된다.
같은 영화 앞의 두 가지 다른 경험
평론가들의 극찬과 한 관객의 잠을 다룬 글이 예전에 있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수전 손택의 시선을 빌려 적은 글에서, 비평이 극찬한 한 영화 앞에서 한 관객이 잠들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을 다룬 적이 있다. 그 글의 한 줄을 다시 가져오면, 한 관객의 정직한 감각적 응답은 비평의 한 줄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손택은 그것을 예술의 에로틱이라는 한 개념으로 옹호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그 글의 정확한 자매편에 가깝다. 그 글이 평론의 극찬 앞에서 한 관객의 잠을 옹호하는 글이었다면, 이 글은 평론의 혹평 앞에서 한 관객의 호평을 옹호하는 글이다. 그리고 두 글에 등장한 두 사상가, 손택과 야우스가 결국 같은 한 가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작품에 대한 진짜 평가는 비평가의 한 줄에서 끝나지 않고, 그 작품을 마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가운데서 매번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
그래서 결국 어떤 영화였나
전지적 독자 시점이 한국 영화사에 남을 명작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 정도의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한 명의 관객이 두 시간 가까이 화면을 따라가는 동안 한 번도 졸지 않았고,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그 설정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한 한 가지 평가다. 그 평가가 평론가들의 한 줄과 다르다고 해서, 그 평가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기대 지평을 가지고 영화관 의자에 앉는 데에서 시작된다. 같은 한 편이 누군가에게는 어긋난 작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즐길 만한 한 편이 된다. 그 모든 응답이 다 가능하고, 다 정직하다. 야우스가 한 시대 동안 말하고 싶었던 한 줄이 결국 그 한 가지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