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일단 믿고 보는 편이다. 베테랑도 밀수도 모가디슈도, 그가 만든 영화에는 한국 상업 영화의 한 정점이라 할 만한 단단함이 있다. 휴민트도 그런 마음으로 눌렀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그 날, 별 정보 없이 그저 류승완이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차가운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첩보전, 맨몸 격투와 총격과 자동차 추격이 빈틈없이 이어지는 그 리듬은 분명히 류승완다웠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그 화려한 액션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 한 도시에 모여든 네 사람,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려지는 한 가지 경계였다.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라는 그 경계.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든 네 사람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의 14번째 장편이자, 2013년의 베를린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후속작이다. 휴민트(HUMINT)라는 제목 자체가 인적 정보,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 얻는 첩보를 뜻하는 정보 용어다. 제목이 이미 영화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 이 영화는 기계나 위성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정보, 그리고 그 정보를 매개로 얽히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한 도시에 네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모여든다.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조인성)은 자기 휴민트 작전에서 희생된 정보원이 남긴 단서를 쫓아 그곳에 닿는다.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은 국경 지역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러 파견된다.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은 그 사건의 배후에 얽혀 있다. 그리고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는 조 과장이 새로운 휴민트 작전의 정보원으로 선택하는 인물이다. 남과 북, 그리고 그 사이에 러시아라는 또 다른 세력까지.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선 사람들이 한 도시에서 충돌한다.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거기서 시작된다. 이 네 사람의 관계가 남이냐 북이냐는 단순한 국적의 선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북한 사람인 박건과 황치성이 같은 편이 아니고, 남한의 조 과장과 북한의 채선화 사이에는 적과 동지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한 가지 미묘한 관계가 자라난다. 영화가 두 시간 동안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 것이 바로 그 경계다.
슈미트가 말한 적과 동지
여기서 한 명의 독일 정치사상가가 떠오른다. 다만 이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인물이다. 카를 슈미트는 20세기의 가장 날카로운 정치사상가 중 하나로 꼽히지만, 동시에 나치 정권에 가담했던 어두운 이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개념을 빌릴 때는 그것을 하나의 분석 도구로만 빌리고, 그가 끝내 도달한 정치적 결론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슈미트가 1932년에 펴낸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에서 내놓은 한 가지 명제는 이렇다.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결국 적과 동지를 가르는 데에 있다는 것. 도덕의 영역이 선과 악을 가르고 미학의 영역이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른다면, 정치의 영역은 적(Feind)과 동지(Freund)를 가르는 그 한 가지 구분 위에 서 있다고 그는 보았다. 한 집단이 자기와 맞서는 또 다른 한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는 그 순간, 비로소 정치라는 것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분명히 날카롭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하다. 적과 동지의 구분을 정치의 본질로 놓는 순간, 그 구분은 끝없이 강화되고 그 끝에는 결국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절멸시키는 논리까지 자리하게 된다. 슈미트 자신이 그 위험한 논리의 끝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우리는 역사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명제는 정치의 한 가지 진실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동시에, 그 진실에 갇혔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경고이기도 하다.
휴민트가 흥미로운 이유는, 영화가 슈미트의 그 명제를 정확히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끊임없이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라는 분명한 적과 동지의 구분이 영화의 출발점이지만,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그 경계의 도시에서 인물들은 그 구분 안에 깔끔하게 머물지 못한다. 적이어야 할 사람과 인간적인 한 결이 오가고, 같은 편이어야 할 사람이 가장 위험한 적이 된다. 영화는 슈미트의 명제를 빌려 와서, 그 명제가 실제 인간들 한가운데서는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가를 보여주는 셈이다.
깃발 뒤에 선 사람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그 흔들리는 경계 위에 선 인물들의 표정이다. 특히 신세경이 연기한 채선화라는 인물. 국가의 도구로 쓰이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한 해외 파견 북한 사람의 위태로운 처지가 그 인물 안에 응축되어 있다. 그는 분명히 북한이라는 한 깃발 아래 서 있지만, 영화는 그 깃발 뒤에 선 한 사람의 얼굴을 끝까지 들여다본다. 그 얼굴 안에는 적도 동지도 아닌, 그저 자기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한 인간이 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슈미트를 넘어선다. 슈미트의 명제가 옳다면 채선화는 그저 적 진영의 한 명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깃발의 구분 뒤편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구분으로는 끝내 담아낼 수 없는 한 인간의 처지를 비춘다. 영화 곳곳에 흐르는 한 남한 유행가가 그 비극을 더 깊게 만든다. 적과 동지로 나뉜 그 살벌한 현실 한가운데에 고향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의 노래가 흐를 때, 우리는 그 깃발들 뒤에 선 사람들이 결국 같은 한 가지 그리움을 가진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본다.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경계를 다룬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된다. 서울의 봄을 보고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을 빌려 적은 글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 글에 등장한 아감벤은 바로 이 슈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철학자다. 슈미트가 적과 동지의 구분을 정치의 본질로 놓았다면, 아감벤은 그 구분이 한 사회를 어떻게 예외상태로 몰아가는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한 사상가가 날카롭게 세운 명제를 다음 세대의 사상가가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그 흐름이, 묘하게도 휴민트라는 영화가 슈미트의 명제를 세웠다가 다시 허무는 그 구조와 닮아 있다.
류승완이 액션 뒤에 숨겨둔 한 줄
휴민트는 분명히 잘 만든 첩보 액션 영화다. 글로벌 시청자들이 그 액션에 열광해 넷플릭스 세계 1위에 오른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듯, 그 화려한 액션의 뒤편에는 한 가지 더 깊은 줄이 숨겨져 있다.
그 한 줄은 결국 경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그 선 위에서 살아가지만, 그 선은 인간이라는 실제 존재 앞에서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깃발은 분명하지만 그 깃발 뒤에 선 사람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휴민트가 화려한 첩보 액션의 무대를 빌려 끝까지 들려주려 한 한 줄이, 어쩌면 그 한 가지였는지 모른다. 차가운 얼음 바다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적과 동지로 나뉜 네 사람이 끝내 보여준 것은 그 구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한 가지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