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나와 안산 CGV의 17시 30분 회차를 예매해두고, 평소처럼 혼자 영화관에 앉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를 보러 가는 길이었고, 솔직히 기대가 적지 않았다.
기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이라는 한 편의 영화로 한국 좀비물의 새 장을 연 사람이다. 그 이후의 작품들이 부산행만큼의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번 군체는 소재 자체가 분명히 신선했다. 좀비들이 서로 연동되어 정보를 교류하고, 그 교류를 통해 실시간으로 진화한다는 설정. 대장 좀비가 다른 좀비들을 조종한다는 그 발상. 기존 좀비물의 문법을 한 번 비트는 이 컨셉만으로도 영화관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한 가지 묘한 감정이 남았다. 분명히 소재는 신선했는데, 그 신선함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는 느낌.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어딘가에서 표현할 수 없는 진부함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용두사미. 영화관을 나서며 떠오른 단어가 그것이었다.

신선했던 컨셉, 군체라는 한 가지 발상
군체의 가장 큰 강점은 분명히 그 컨셉이다.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로 봉쇄된 둥우리 빌딩 안, 고립된 생존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진화하는 감염자들에 맞선다. 여기서 핵심은 이 좀비들이 더 이상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네트워크로 실시간 연결되어 정보를 공유하고, 한 덩어리처럼 함께 움직이며, 생존자들의 한 가지 전략이 통하는 순간 곧바로 그 정보를 학습해 다음에는 그 전략을 무력화한다.
이 설정은 분명히 무섭다. 생존자들이 사람 모양 입간판으로 좀비를 따돌리는 데 성공하는 그 순간, 좀비들에게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되어 같은 수법이 다시는 통하지 않게 되는 장면. 적이 나의 모든 수를 실시간으로 학습한다는 그 공포는 기존의 어떤 좀비물에서도 보기 어려운 한 가지였다. 좀비를 연기한 현대 무용가들의 그 기괴한 군집 동작도 인상적이었고, 영화 후반부 좀비들이 한 몸처럼 뭉쳐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클라이맥스도 분명히 볼 만했다.
여기까지였다면 나는 이 영화를 신선한 한 편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신선한 컨셉 위에 얹힌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자꾸 힘을 잃었다.
뒤르켐이 말한 집합의식
영화가 끝나고 그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의 정체를 곱씹다가, 한 명의 사회학자가 떠올랐다.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거의 처음 세운 사람 중 하나인데, 그가 평생 붙들었던 한 가지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개인들이 단순히 모여 있는 것을 넘어, 그 개인들의 총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가지 집합적 존재가 어떻게 태어나는가.
뒤르켐은 그것을 집합의식(conscience collective)이라 불렀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과 감정의 총체인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개인들의 의식을 단순히 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집합의식은 개인을 넘어선 한 가지 독자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며, 오히려 개인들의 의식을 거꾸로 규정하고 움직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 생각과 행동의 많은 부분이 그가 속한 집합의식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뒤르켐이 보기에 진짜 무서운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작동하는 그 집합적 차원 자체였다.
군체라는 제목과 그 컨셉은 정확히 뒤르켐의 그 주제 위에 서 있다. 영화의 좀비들은 개별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군체, 그러니까 개체의 총합을 넘어선 한 가지 집합적 존재로 진화한다. 한 마리 한 마리의 좀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그 집합적 지성이 무섭다. 이 설정은 뒤르켐이 말한 집합의식의 한 공포스러운 우화라고 할 만하다.
영화가 끝내 들이대지 못한 거울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내가 느낀 그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의 정체도 드러난다. 뒤르켐의 통찰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 집합의식이 좀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 사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기도 모르게 집단의 한 부분으로 작동하고, 집단의 정보가 개인을 규정하며, 한 사람의 자유로운 판단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거대한 군체의 한 표현일 뿐인 그 풍경. 이것은 좀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좋은 좀비 영화는 늘 그 거울을 인간에게 들이대 왔다. 좀비라는 장르적 우화를 빌려, 사실은 우리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비추는 것. 연상호 감독 자신도 부산행에서 그 거울을 정확하게 들이댔다. 군체의 컨셉은 그 거울을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들이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단 지성으로 연결된 좀비라는 설정은, 모두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우화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그 거울을 끝까지 충분히 들이대지 못했다. 좀비들의 연동과 진화는 흥미로운 하나의 기능적 설정으로 머물렀을 뿐, 그것이 우리 인간 사회의 무엇을 비추는가에 대한 깊은 한 줄까지는 끝내 닿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신선했던 컨셉이 후반부로 갈수록 그저 좀비와 싸우는 익숙한 생존극의 문법 안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캐릭터들의 서사는 개연성이 부족했고, 꼭 한두 명씩 등장하는 그 어설픈 민폐 캐릭터들의 행동은 긴장을 살리기보다 오히려 몰입을 깼다. 내가 느낀 그 표현할 수 없는 진부함의 정체가 거기에 있었다. 가장 신선한 소재를 들고도, 그 소재가 끝내 가리킬 수 있었던 깊은 한 곳까지 영화가 데려가 주지 못한 것이다.
신선한 소재 앞에서 느낀 아쉬움에 대하여
평이 좋은 영화 앞에서 한 관객이 느끼는 정직한 아쉬움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 번 적은 적이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수전 손택의 시선을 빌려 적은 글에서, 평론가들이 극찬한 영화 앞에서 한 관객이 잠든 그 경험을 다룬 적이 있다. 그 글의 한 줄을 다시 가져오면, 한 관객의 정직한 감각적 응답은 그 자체로 하나의 평가라는 것이었다.
군체에 대한 나의 아쉬움도 같은 자리에 있다. 군체는 분명히 실관람객 평가가 높은 편이고, 부산행 이후 연상호 감독의 좀비물 중에서는 가장 나은 축에 든다는 평이 많다. 그 평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그 신선한 컨셉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후반부에 힘을 잃는 그 지점에서 분명한 아쉬움을 느꼈고, 그 아쉬움 또한 이 영화에 대한 하나의 정직한 응답이다.
용두사미라는 단어를 영화관을 나서며 떠올렸던 그 감각을, 이 글에서 굳이 부드럽게 다듬지 않았다. 가장 신선한 머리를 가지고도 그 꼬리까지 그 신선함을 끌고 가지 못한 영화. 그것이 군체에 대한 나의 정직한 한 줄이다. 그래도 연상호 감독이 또 어떤 좀비를 들고 올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가장 신선한 발상을 던질 줄 아는 감독이라는 사실만큼은, 이 영화 앞에서도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