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 사극을 봤다. 그것도 안중근이라는,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한 영웅의 이야기다. 현빈이 안중근 역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막상 영화를 본 뒤에는 그 캐스팅이 정말 잘 어울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일어난 그 결정적인 한 발의 총성도 아니었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어떤 액션 장면도 아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비추는 한 장면, 그러니까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는 그 짧은 한 결정이었다.

신아산의 전투, 그리고 한 사람의 결정
영화 초반에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면이 나온다.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 몇 명이 포로로 잡힌다. 여기서 한 가지 결정의 순간이 온다. 동지들은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적이고, 이들을 살려두면 결국 우리 동지들의 위치가 일본군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다른 결정을 내린다. 만국공법, 그러니까 국제법에 의거하여 포로를 살려 보낸다.
영화가 이 장면을 보여준 뒤 곧이어 비추는 풍경은 더 잔혹하다. 살려 보낸 그 일본군들이 결국 일본 본진에 의병의 위치를 알리고, 그 정보를 받은 일본군이 안중근의 동지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한 사람의 원칙적 결정이 동지들의 죽음으로 직접 이어진 셈이다.
이 장면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안중근은 그 결정을 후회했을까. 동지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 결정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을 텐데, 그는 그것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리고 솔직히 한 가지가 더 떠오른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히 말하면, 나였다면 그 일본군들을 하나도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정직한 답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다른 결정을 내렸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 그리고 의(義)
전국시대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맹자》라는 짧지 않은 책 안에서 한 가지를 끈질기게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 안쪽에는 본래 네 가지 단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단(四端). 첫째가 측은지심(惻隱之心),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측은해하는 마음이다. 둘째가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다 여기는 마음이다. 셋째가 사양지심(辭讓之心), 자기를 낮추고 양보하는 마음이다. 넷째가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다.
맹자에게 이 네 단서는 그저 추상적인 도덕 항목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단서를 길러내느냐 묻어두느냐가 한 사람을 일반 사람으로 살게 하는가, 아니면 대장부로 살게 하는가를 가른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대장부의 정의가 또렷하다. "위협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고, 부귀로도 그를 흔들 수 없으며, 빈천함으로도 그를 옮기지 못한다(威武不能屈,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영화 속 안중근을 맹자의 시선으로 다시 보면, 그가 그 포로 석방의 결정을 내린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는 일본군이 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풀려나면 동지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 안쪽에 깃든 측은지심이 그 적의 죽음, 그리고 그 적의 가족들이 받게 될 슬픔까지를 함께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측은지심이 의(義)와 만나는 곳에서 한 가지 결정이 나왔다. 만국공법에 따라 그들을 살려 보내는 일.
비슷한 결의 윤리적 딜레마를 서양철학으로 풀어본 적이 있다. 예전에 미 비포 유를 보고 칸트의 의무론과 밀의 공리주의를 빌려 적은 글에서, 한 인간의 결정이 원리에 따른 것이어야 하는가 결과에 따른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큰 입장의 충돌을 다룬 적이 있다. 칸트가 옳다면 안중근의 결정은 옳다. 밀이 옳다면 안중근의 결정은 동지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결정을 놓친 셈이 된다. 그러나 동양의 맹자에게는 또 다른 결이 있었다. 그에게 옳고 그름은 단지 원리와 결과의 계산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쪽에 본래 깃든 네 가지 단서를 끝까지 따르는가의 문제였다.
그릇의 크기
영화를 다 본 뒤에 한 가지 말이 자꾸 떠올랐다. 안중근이라는 사람의 그릇이 일반 사람과는 다른 결로 컸다는 것. 영화가 그를 단순한 영웅이나 거장으로만 그리지 않고, 같은 한 명의 사람으로서 가지는 깊은 고뇌까지 함께 그려냈기 때문에 그 그릇의 크기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지들이 죽어가는 모습 앞에서 그가 자기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 안에서 안중근의 얼굴 위로 잠시 스치는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가 그 무게를 분명히 짊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한 증거다.
그러나 그 무게를 짊어진 채로도 그는 다음 한 발을 내딛는다. 하얼빈 역에서의 그 한 발. 한 사람이 자기 결정의 모든 무게를 끝까지 지고도 그다음의 결정을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맹자가 말한 대장부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위협으로도 굴복하지 않고, 부귀로도 흔들리지 않으며, 빈천으로도 옮기지 못하는" 한 사람의 풍경.
영화가 끝까지 그리려 한 안중근은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일본군 포로조차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고 그 가족의 슬픔까지 함께 떠올린 한 사람이다. 그 그릇 위에서 그가 한 발의 총성을 울렸다는 사실, 영화는 그 점을 끝까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음에 다시 볼 때
하얼빈은 분명히 다시 볼 영화다. 다음에 다시 볼 때는 또 어떤 한 장면이 새롭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때도 영화의 도입부 그 한 결정 앞에서 한 번 더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 번 더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안중근은 어떤 사람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