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개봉한 〈미 비포 유(Me Before You)〉는 영국 작가 조조 모예스의 동명 소설(2012)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우연한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청년 윌(샘 클라플린)과 그의 새 간병인이 된 루이자(에밀리아 클라크)의 만남을 그린 멜로 드라마지만, 영화가 진짜로 끝까지 던지고 있는 질문은 사랑보다 훨씬 무거운 자리에 있다. 한 사람이 자기 죽음의 시간과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은 과연 정당한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 의무의 위반인가. 이 글에서는 OTT로 본 감상과 함께, 임마누엘 칸트와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두 거인이 이 질문 앞에 내놓은 정반대의 답을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1. Wavve로 본 미 비포 유 영화 후기
평소처럼 Wavve를 둘러보다가 익숙한 포스터에 끌려 〈미 비포 유〉를 틀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로맨스 영화 한 편 보고 자려는 마음이었는데, 영화가 끝났을 때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윌과 루이자의 사랑이 천천히 자라나는 과정은 분명히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영화가 흘러갈수록 그 따뜻함 너머로 한 가지 묵직한 사실이 점점 또렷해진다. 윌은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이미 정해놓고 이 만남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루이자의 사랑이 그 결심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영화는 끝까지 윌의 마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보고 나면 한참 멍하게 앉아 있게 되는 그런 종류의 영화였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따뜻한 풍경 안에 인간 존엄에 관한 가장 무거운 질문을 함께 박아둔 작품이었다.

2. "두 팔로 당신을 안을 수 있다면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생각은 윌이 두 팔로 루이자를 안을 수 있다면, 과연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는 루이자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깊게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는 그 몸 안에 머무르면서 그녀의 인생까지 그 자리에 묶어두는 일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가 떠나야 한다는 그 역설적인 결심 앞에서, 관객은 함부로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가 사라지는 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그가 머무는 것이 사랑인가. 영화는 그 질문에 끝까지 정답을 주지 않는다.
3. 칸트의 의무론,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1785년의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1797년의 《도덕형이상학》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일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남겼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마저도 단순히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행위, 즉 자기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를 끝내는 일은 그가 보기에 인간 존엄에 대한 가장 깊은 자기 모순이었다. 칸트의 시선으로 윌의 선택을 본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 자기 의무의 위반에 가깝다. 진짜 존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끝까지 목적으로 대하는 자리에 있으며, 사지의 자유를 잃었다는 사실이 한 인간의 인간됨을 결코 줄어들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평생 양보하지 않은 자리였다.
4. 밀의 자유론,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자기가 주권자다
정확히 그 반대 자리에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서 있다. 그가 1859년에 펴낸 《자유론(On Liberty)》은 근대 자유주의의 가장 단단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밀은 그 책에서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을 못 박았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몸과 정신에 대해 개인은 주권자다." 누군가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 행위를 막을 정당한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밀의 시선으로 윌의 선택을 본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결정을 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내린, 마지막까지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 자리다. 진짜 존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인생에 관한 결정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지 않는 자리에 있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조차 그 결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입장이었다.
5. 두 입장이 부딪치는 자리, 우리 시대의 존엄사 논쟁
칸트와 밀의 두 명제는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의 가장 깊은 두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한쪽에서는 어떤 고통도 한 인간을 자기 자신의 수단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풍경만큼은 자기 손으로 결정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답한다. 현재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 일부 국가에서는 엄격한 절차 아래 조력 사망이 합법화되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전히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한 줄로 잘라 말할 수 있다면, 200년 동안 이 논쟁이 이어졌을 리 없을 것이다. 〈미 비포 유〉가 윌의 선택을 응원도 비난도 하지 않는 자리에서 끝나는 이유 또한, 이 영화가 정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우리 앞에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6. 내가 만약 윌의 자리에 선다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머문 질문은 결국 한 가지였다. 만약 내가 윌의 자리에 선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 자리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평소 같으면 칸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가도, 막상 윌의 표정을 마주하면 밀의 한 문장이 한층 묵직하게 다가온다. 자기 인생의 마지막 한 컷을 자기 손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한 인간에게 또 다른 종류의 굴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그 손을 한 번 더 잡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칸트가 평생 지키려 한 그 자리가 왜 그토록 단단했는지도 천천히 이해가 갔다. 어떤 답을 내려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질문, 그것이 존엄사라는 주제의 진짜 무게다.

7. 사회적으로 함께 생각해 볼 시점, 무엇이 정답일까
가장 분명해진 것 한 가지는, 이 질문이 더 이상 영화 속 한 사람의 문제로만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의료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지만, 동시에 '오래 사는 것'이 곧 '잘 사는 것'과 같지 않은 자리도 함께 늘어난다. 그 자리에서 한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사회는 그 결정을 어디까지 보호하거나 또 막을 수 있어야 하는가. 칸트의 한 자리와 밀의 한 자리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 사회 역시 자기 자리를 천천히 찾아가야 하는 시간 앞에 와 있다. 〈미 비포 유〉가 한 편의 로맨스 영화임에도 마음에 그토록 오래 남는 이유는, 결국 이 무거운 질문을 가장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 손에 쥐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은 누구도 쥐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질문 앞에 함께 멈춰 서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