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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 — 마석도의 주먹, 그리고 벤야민이 말한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

by Life philosophy 2026. 6. 19.

범죄도시 시리즈는 이제 한국 액션 영화의 한 상징이 되었다. 마동석이라는 한 배우의 거대한 주먹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그 주먹 한 방에 악당이 나가떨어질 때마다 영화관 전체가 통쾌함으로 들썩인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2017년의 범죄도시1이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가리봉동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는 장첸이라는 한 잔혹한 범죄자, 그리고 그를 쫓는 괴물 같은 형사 마석도. 두 사람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그 압도적인 긴장과, 마석도의 주먹이 장첸을 제압하는 그 마지막의 통쾌함. 분명히 잘 만든 오락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통쾌함 한가운데에서 한 가지 묘한 질문이 떠올랐다. 마석도가 장첸을 제압하는 그 방식은, 과연 장첸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영화 범죄도시 포스터

마석도의 주먹, 장첸의 칼

범죄도시1의 구도는 명확하다. 한쪽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신흥 범죄조직의 두목 장첸(윤계상)이 있다. 그는 인간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잔혹한 인물이고, 그의 등장만으로 가리봉동 일대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다른 한쪽에는 형사 마석도(마동석)가 있다. 그는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범죄자를 다루는 방식은 결코 점잖지 않다. 그의 주먹은 법전보다 먼저 나가고, 그의 취조는 거의 폭력에 가깝다.

이 영화가 그토록 통쾌한 이유는 분명하다. 장첸이라는 압도적인 악 앞에서, 그보다 더 압도적인 힘을 가진 마석도가 등장해 그 악을 물리적으로 짓눌러버리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우리가 현실에서 두려워하는 그 폭력적인 악을, 더 강한 한 사람이 같은 물리적 힘으로 분쇄해주는 그 통쾌함.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한 가지 묘한 지점이 있다. 마석도가 장첸을 제압하는 그 방식은, 결국 더 큰 주먹으로 더 작은 주먹을 누르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것은 법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다. 장첸이 칼로 사람들을 제압했다면, 마석도는 주먹으로 장첸을 제압한다. 화면 위에서 두 사람의 폭력은 묘하게 대칭을 이룬다. 한쪽은 범죄라 불리고 다른 한쪽은 정의라 불리지만, 폭력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아 있다.

벤야민이 말한 두 가지 폭력

이 묘한 대칭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한 사람이 있다.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1921년에 쓴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라는 짧고 어려운 글에서, 폭력이라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했다.

벤야민의 통찰은 이렇다. 우리는 흔히 폭력을 나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의 법질서 그 자체가 한 가지 폭력 위에 서 있다. 그는 이것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법정립적 폭력이다. 새로운 법질서를 세우는 폭력, 그러니까 혁명이나 쿠데타처럼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그 힘이다. 다른 하나는 법보존적 폭력이다. 이미 세워진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 그러니까 경찰과 군대 같은 공권력이 행사하는 그 힘이다.

벤야민이 던진 가장 날카로운 한 줄은, 이 두 폭력이 사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법을 세우는 폭력과 법을 지키는 폭력은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둘 다 결국 힘으로 한 질서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특히 그는 경찰의 폭력을 주목했다. 경찰은 법을 집행한다는 명분으로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법을 세우는 폭력과 법을 지키는 폭력이 그 안에서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경찰의 폭력은 법의 이름으로 행사되지만, 그 순간 경찰은 거의 스스로 법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범죄도시1의 마석도가 정확히 벤야민이 주목한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는 법을 지키는 공권력, 즉 법보존적 폭력의 화신이다. 그러나 그가 범죄자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그는 거의 법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의 주먹이 곧 법이고, 그의 판단이 곧 집행이다. 마석도가 통쾌한 이유는 바로 그가 법의 절차라는 번거로운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힘으로 정의를 실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시선에서 보면 그 통쾌함의 정체는 다소 불편하다. 우리가 환호하는 그 장면은, 사실 공권력이 법의 절차를 넘어 거의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폭력에 환호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폭력에 그토록 환호할까. 답은 단순하다. 현실의 법은 너무 느리고, 너무 자주 무력하기 때문이다. 장첸 같은 압도적인 악 앞에서 법의 정상적인 절차는 답답하고 무력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절차를 건너뛰고 곧바로 악을 분쇄해주는 한 사람의 주먹에 환호한다. 마석도는 우리가 현실에서 갈망하지만 끝내 갖지 못하는 그 즉각적인 힘의 정의를 대신 실현해준다.

비슷한 통쾌함을 다른 영화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베테랑을 보고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우리가 갑질 응징의 통쾌함에 열광하는 이유를 무시당한 자의 인정투쟁이라는 각도에서 다룬 적이 있다. 베테랑이 그 통쾌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풀었다면, 범죄도시1은 같은 통쾌함의 한 가지 불편한 면을 함께 보게 만든다. 우리가 환호하는 그 정의의 폭력이, 사실은 벤야민이 경고한 그 무제한의 공권력 폭력과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 두 영화가 같은 통쾌함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이 분석이 범죄도시1의 재미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영화고, 그 통쾌함은 분명히 진짜다. 다만 그 통쾌함 한가운데서 한 번쯤 벤야민의 질문을 떠올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환호하는 정의의 폭력과 우리가 두려워하는 범죄의 폭력은, 정말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 둘을 가르는 선은 생각보다 가늘지 않은가.

통쾌함 너머에 남는 한 가지 질문

범죄도시1은 분명히 잘 만든 오락 영화다.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압도적인 존재감, 윤계상이 그려낸 장첸의 서늘한 악, 그리고 그 둘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카타르시스. 이 영화가 거대한 시리즈로 이어진 것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좋은 오락 영화의 한가운데에도 한 가지 질문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범죄도시1이 우리에게 던지는 그 질문은,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마석도의 주먹에 환호하지만, 그 주먹이 휘둘러지는 그 순간 법의 절차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그 멈춰선 자리에서 한 사람의 힘이 곧 정의가 된다. 벤야민이 한 세기 전에 던진 그 불편한 질문이, 마석도의 통쾌한 주먹 한 방 뒤에 조용히 숨어 있었던 셈이다. 그 통쾌함을 즐기되, 그 질문 또한 한 번쯤 떠올려보는 것. 그것이 이 영화를 한 번 더 깊이 보는 한 가지 방법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