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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리오 영화 후기와 마키아벨리가 본 정의의 회색 지대

by Life philosophy 2026. 5. 5.

2015년 드니 빌뇌브 감독이 내놓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을 그린 범죄 스릴러다. 'Sicario'는 스페인어로 '청부 살인자'라는 뜻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로마 시대 단검을 품고 다니던 자객 '시카리이(Sicarii)'에서 유래한 말이다.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정체를 알 수 없는 CIA 작전 책임자 맷(조시 브롤린), 그리고 멕시코 검사 출신의 알레한드로(베니시오 델 토로)가 같은 작전 안에 있지만, 셋은 완전히 다른 정의를 좇아 움직인다. 이 글에서는 넷플릭스로 여러 번 다시 본 감상과 함께, 16세기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시선으로 영화가 들이미는 회색 지대를 들여다보려 한다.

1. 넷플릭스로 열 번 본 시카리오 영화 후기

〈시카리오〉는 내가 손에 꼽는 인생 영화 중 한 편이다.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처음 본 뒤로, 어림잡아도 열 번은 더 다시 봤다. 신기한 건 볼 때마다 같은 감각이 살아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흔히 떠올리는 액션 영화 같은 폭발적인 장면이 거의 없다. 진행도 느리고, 대사도 적고, 등장인물들조차 감정을 드러내는 데 무척 인색하다. 그런데도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살짝 누르고 있는 듯한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자극적인 사건을 들이대지 않고도 관객의 호흡을 한 시간 반 내내 붙들어두는 이 영화의 능력은, 같은 장르의 어떤 작품과도 다르게 느껴진다.

 

2. 빌뇌브 감독이 사막을 거듭 그리는 이유

긴장감의 절반은 작곡가 요한 요한손이 만든 음악에 있다고 본다. 멜로디라기보다는 거대한 짐승이 어딘가에서 숨을 고르는 듯한 묵직한 저음이 영화 전체를 받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가 그려내는 풍경, 특히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이다. 빌뇌브 감독의 영화에는 〈그을린 사랑〉부터 〈컨택트〉, 〈블레이드 러너 2049〉, 〈듄〉에 이르기까지 거의 빠짐없이 사막이 등장한다. 그가 사막을 거듭 화면에 담는 이유는 단순한 미장센 취향이라기보다, 인간이 만든 법과 질서가 닿지 않는 광대한 공백을 보여주기에 그만큼 적합한 풍경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카리오〉의 사막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다.

 

3. 마키아벨리가 말한 권력과 정치의 현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513년에 《군주론(Il Principe)》을 썼다. 이 짧은 책이 후대에 끼친 충격은 컸다. 그때까지 정치 이론서들이 대체로 "통치자는 어떻게 선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면, 마키아벨리는 정반대 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서 통치가 출발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자리는 늘 거짓과 폭력과 음모가 함께 도사린 위험한 무대였고, 그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는 사자의 용맹과 동시에 여우의 교활함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 한 가지 통찰이 이후 500년 동안 정치라는 영역의 가장 불편한 진실로 남았다.

 

4. 케이트, 맷, 알레한드로 - 세 가지 정의의 얼굴

이 시선으로 〈시카리오〉의 세 인물을 다시 들여다보면 영화의 구도가 한층 또렷해진다. 케이트는 법과 절차로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다. 그녀는 영화 내내 "이건 합법인가요"를 묻지만, 그 질문에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맷은 정확히 마키아벨리주의자의 전형이다. 더 큰 카르텔을 잡기 위해 작은 카르텔을 활용하고, 법을 우회하는 일에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정의란 결과로만 측정된다. 알레한드로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도 법도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잃어버린 가족을 위한 사적 복수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단 하나의 동력이다. 영화는 이 셋 가운데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5. 회색 지대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빌뇌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회색이라 생각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시카리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여긴 늑대들의 땅이고, 너는 늑대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비로소 이 영화가 던지고 있던 진짜 질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이 닿지 않는 자리, 그러니까 사막 너머의 회색 지대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빌뇌브가 마지막을 굳이 케이트의 떨리는 시선으로 닫은 이유도, 마키아벨리의 책이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도 결국 같은 한 점에서 만난다. 정답이 없는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 일, 어쩌면 그것이 회색 지대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윤리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