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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 사이다의 정체, 그리고 푸코가 말한 사라진 처벌의 스펙터클

by Life philosophy 2026. 6. 8.

주말 내내 한 드라마를 다 본 적이 오랜만이다. 그것도 한 번에 다 푸는 OTT 시리즈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서, 토요일 오후에 시작해 일요일 밤까지 10화를 거의 다 봤다. 넷플릭스의 신작 참교육이다.

다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사이다. 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 있었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통쾌하게 한 방씩 날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그래, 그렇지!"라는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우리는 왜 이런 식의 이야기 앞에서 이렇게 시원해할까. 정말로 한국 사회에 교권보호국 같은 기관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그 시원함의 진짜 정체일까.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가 1975년에 쓴 한 권의 책이 그 의문에 한 가지 답을 내어 준다.

넷플릭스 참교육 포스터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는다는 한 가상의 조직

참교육은 채용택, 한가람 작가의 동명 네이버웹툰이 원작이다. 6월 5일에 전 세계 동시 공개된 10부작 시리즈로, 소년심판의 홍종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이남규 작가가 극본을 썼다. 김무열이 교권보호국 감독관 나화진 역으로 극을 이끌고, 이성민이 교육부 장관 최강석을, 진기주가 특전사 출신 감독관 임한림을, 표지훈이 사무관 봉근대 역을 맡았다.

드라마의 설정은 단순하다.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만든 가상의 부처 "교권보호국"이 있고, 그 안의 감독관들이 매 화마다 다른 학교에 투입되어 학교폭력 가해자, 학부모 갑질, 일부 교사의 비위 등 우리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교육 현장의 그늘들을 하나씩 정리한다. 옴니버스 형식이라 한 화에 한 학교, 한 사건이 닫히는 구조라 호흡도 빠르고 카타르시스의 주기도 짧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분명히 시원한 한 가지가 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평생 한 번쯤 마주쳤거나, 직접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뉴스에서 매번 다시 마주치는 그 익숙한 가해자들에게, 한 사람이 분명한 한 방을 정확하게 날린다. 그리고 그 한 방이 법적으로도 절차적으로도 흠 없이 마무리된다. 이것이 우리 일상에서 그대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한 가지 환상이 화면 안에서 구현되는 풍경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토록 이 환상이 필요한가.

푸코가 1975년에 적은 한 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75년에 펴낸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에서 한 가지 큰 전환을 짚어 낸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처벌은 공개적인 사건이었다.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 한가운데에서 범죄자의 몸에 직접 형벌이 가해지는 모습을 모두가 함께 보았다. 처벌은 분명한 한 편의 스펙터클이었고, 그 스펙터클을 통해 사람들은 정의가 분명히 실현되었다는 한 감각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19세기를 지나면서 이 모든 풍경이 사라졌다. 처벌은 광장에서 감옥으로 옮겨졌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사형도 점점 밀실의 일이 되었다. 푸코가 이 변화를 짚어 낸 이유는 단순했다. 그 변화로 인해 사람의 신체에 직접 가해지던 잔혹한 형벌이 사라진 것은 분명히 진보였지만, 동시에 한 가지가 같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함께 보고 함께 느꼈던 처벌의 카타르시스 그 자체다.

푸코의 한 핵심 논지가 거기서 나온다. 처벌이 보이지 않게 된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게 된 카타르시스를 어떻게든 다시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근대의 미디어, 그러니까 신문, 소설, 영화, 그리고 지금의 드라마와 OTT 시리즈는 사라진 그 처벌의 스펙터클을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살려낸다. 그 스펙터클을 보는 동안 시청자는 자기가 일상에서 영영 보지 못할 처벌의 카타르시스를 한 컷 한 컷 대신 경험한다.

참교육의 사이다는 정확히 그 자리에서 솟아 나온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는 합당한 처벌이 가해지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시스템은 분명히 작동하지만, 그 작동의 카타르시스는 우리 시야에서 멀어져 있다. 그 사라진 카타르시스를 참교육이 화면 안에서 한 화에 하나씩 정확하게 복원해준다. 시원한 그 감정은 그래서 정의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사라진 처벌 스펙터클에 대한 갈증의 한 표현이라고 푸코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여기까지 들여다보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시원하다는 그 감정은 분명히 진짜이고, 그 감정의 뿌리가 푸코의 시선에서 그렇게 설명된다 하더라도, 그러면 그 감정에 충실해도 되는가. 정말로 교권보호국 같은 가상의 조직이 우리 사회에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

자경주의의 환상에 관해서는 예전에 용감한 시민을 보고 방관자 효과를 빌려 적은 글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다룬 한 가지는, 시민 한 명이 직접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망은 사회 시스템이 그 정의를 충분히 실현해주지 못한다는 깊은 좌절의 한 거울이라는 것이었다. 참교육도 같은 종류의 거울에 가깝다. 가상의 부처를 만들어서라도 교권을 바로잡고 싶다는 그 한 줄짜리 욕망이, 사실은 현실의 교권이 그만큼 무너져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까 사이다의 진짜 의미는 그 시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원함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한 가지 사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처벌과 정의의 시스템이 한 시민이 매일 느끼기에는 너무 멀고 너무 느리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참교육의 통쾌한 한 컷 한 컷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로 보아야 할 한 가지는, 어쩌면 그 통쾌함이 왜 그토록 필요했는가에 대한 한 가지 자문이다.

그래도 다음 시즌을 기다린다

물론 이 모든 분석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다. 시즌 2가 나온다면 또 한 번 주말을 비우고 정주행할 것이다. 푸코가 알려준 사실이 분명하더라도, 사라진 처벌 스펙터클에 대한 갈증은 분명히 진짜고, 그 갈증을 한 편의 드라마가 잠시라도 풀어 주는 일은 분명히 가치가 있다. 다만 그 시원함의 한가운데서 한 번쯤은 한 발 떨어져 서 본다면, 우리는 그 사이다의 진짜 정체를 한 번 더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참교육이 들려준 가장 깊은 한 줄은, 어쩌면 그 사이다의 통쾌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통쾌함이 우리 사회에 대해 묵묵히 가리키고 있는 한 가지 방향이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