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미야기 료타의 과거, 그리고 다니자키가 말한 그늘의 미학

by Life philosophy 2026. 6. 11.

슬램덩크는 나에게 단순한 만화 한 편이 아니다. 학창 시절 한참을 정독한 32권을 머리에 다 담은 채로 한 시대를 지나온 한 사람에게, 그 작품의 영화화 소식은 분명히 한 가지 떨림이었다. 그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국에 개봉한 날 가장 먼저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며칠 사이에 세 번을 다시 보았다. 일본어 원판 한 번, 한국어 더빙판 두 번. 그렇게 같은 영화를 세 번 보고 나서야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영화는 슬램덩크의 영화가 아니라, 슬램덩크 이후를 위한 한 편의 다른 작품이라는 것.

영화는 그 점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우리가 30년 가까이 주인공으로 알아왔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니라, 늘 화면 한구석에서 빠른 드리블로 코트를 가로지르던 한 작은 가드, 미야기 료타가 이 영화의 시점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의 변화가 곧 영화 전체의 결을 결정한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주인공이 바뀐다는 한 가지 결정

원작 슬램덩크가 사쿠라기의 한 시즌을 그렸다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미야기 료타의 한 인생을 그린다. 영화는 그가 어린 시절 형을 잃은 한 사건에서 출발해, 그 상실의 무게를 안고 농구 코트 위에 선 한 청년의 풍경을 따라간다. 사쿠라기와 루카와가 만들어내는 큰 감정의 파도 뒤편으로, 미야기라는 한 인물이 자기만의 한 시간을 천천히 풀어 놓는다.

이 시점 변경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 슬램덩크라는 한 작품을 30년 가까이 들고 살아온 팬들에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익숙한 그 코트 위에서 익숙한 그 인물들 옆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한 인물의 한 시간을 새로 들이밀어 놓는다. 그 시간이 화면 위에 펼쳐지는 동안 우리는 30년 동안 보았던 사쿠라기와 루카와를 다시 한 번 새롭게 보게 된다. 그들이 그 코트 위에서 단지 자기들의 한 시즌만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옆에 있던 미야기의 한 시간 안에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분명해진다.

과거와 현재가 같은 한 화면 안에서 흐른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 한 가지는 미야기의 과거와 산왕공업고교와의 결승전 현재를 한 호흡으로 교차시킨다는 점이다. 한 컷에서 미야기는 어린 시절 형과 함께 농구를 하던 한 풍경에 있고, 다음 컷에서는 산왕전 코트 위에서 빠르게 드리블을 치고 있다. 그 두 시간이 같은 화면 안쪽에서 끊임없이 겹쳐 흐르면서, 우리는 한 인물의 현재 한 컷이 그가 살아온 모든 시간의 한 결산임을 천천히 알아 가게 된다.

같은 시선의 영화 한 편이 예전에 있었다. 어바웃 타임을 다시 보고 베르그송을 빌려 적은 글에서, 시간이 잘라낼 수 있는 객관적 단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의식 안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가는 한 덩어리라는 베르그송의 통찰을 다룬 적이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통찰을 화면 안에서 한 번 더 정확하게 실현해 보인다. 미야기의 과거와 현재는 분리된 두 시간이 아니다. 한 코트 위의 한 컷 안에 그 모든 시간이 한 덩어리로 흘러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에 패스 한 번을 내어줄 때, 그 패스 안에는 어린 시절 형의 모래사장 위 한 컷까지 함께 들어 있다.

마지막 한 컷의 침묵, 그리고 다니자키의 그늘

이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은 분명히 산왕전 종료 직전의 그 한 컷이다. 1초의 마지막 공격, 루카와의 한 패스, 그 패스를 받은 사쿠라기의 점프슛, 공이 림을 통과하기 직전의 그 짧은 정지, 그리고 골이 들어가는 한 순간. 이 모든 풍경이 화면 위에 펼쳐지는 동안 영화는 한 가지를 의도적으로 비워 놓는다. 소리다.

응원의 함성도, 코치의 외침도, 신발이 마룻바닥에 닿는 마찰음도, 공이 림에 부딪히는 한 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 한가운데에 있어야 마땅한 모든 소리가 일순간에 빠져나가고, 영화관 안에는 오직 화면 위 한 컷의 시각적 풍경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비어 있는 한 자리가 만들어내는 긴장의 크기가, 같은 장면을 만약 거대한 함성으로 채웠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한가운데서 분명히 깨닫는다.

이 한 장면 앞에서 한 명의 일본 작가가 떠오른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933년에 펴낸 짧은 미학 에세이 《그늘에 대하여(陰翳礼讃)》에서, 일본의 전통적 미학이 끝까지 옹호해 온 한 가지를 정리해 보인 적이 있다. 빛이 아니라 그늘, 채워짐이 아니라 비어 있음, 소리가 아니라 침묵 위에 일본의 미학이 서 있다는 것. 가장 깊은 무엇은 가득 차오른 곳에서가 아니라 비어 있는 그 한가운데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산왕전의 마지막 한 컷이 정확히 다니자키가 옹호한 그 한 가지였다. 영화가 만약 그 장면을 함성과 음악으로 가득 채웠더라면, 그 결정적인 한 슛은 분명히 인상적인 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침묵으로 비워 둠으로써, 영화는 그 한 컷 안에 다니자키가 평생 옹호하던 그 깊은 무엇을 비로소 끌어올려 놓는다. 그늘이 빛보다 더 밝고, 침묵이 소리보다 더 크다는 한 줄짜리 미학의 결이 그 짧은 한 컷 안에 다 들어 있다.

사쿠라기와 루카와의 하이파이브

그리고 그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두 인물이 잠깐 마주 서서 손을 마주친다. 사쿠라기와 루카와. 32권의 만화 내내 서로 으르렁거리고 한 번도 자기 마음의 한 줄을 상대에게 직접 건넨 적이 없던 두 사람이, 마지막 한 컷에서 그저 손바닥 하나를 마주치는 짧은 동작 하나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린다.

이 한 컷에 어떤 대사도 없다. 두 인물 사이의 그 오래된 라이벌 관계, 두 사람이 각자의 한 시즌 동안 자기를 어떻게 부풀려왔는가에 대한 한 줄짜리 정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한 팀이라는 큰 풍경 안에서 어떻게 함께 닿는가에 대한 결산. 이 모든 것이 손바닥 한 번의 마주침 안에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마주침을 영화가 침묵 위에 올려놓는다.

다니자키가 일생 동안 옹호한 일본 미학의 한 결이 정확히 그 한가운데에 다시 한 번 다 들어 있다. 가장 큰 화해는 가장 큰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말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서, 그저 손바닥 한 번의 짧은 마주침으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

다시 누를 때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한 컷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처음 본 그 날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30년 가까이 들고 있던 한 작품의 한 풍경이, 다른 한 인물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이렇게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영화를 다시 누를 때마다 그 새로움이 매번 다시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

이 영화는 분명히 또 한 번 보게 될 것이다. 일본어 원판도 한국어 더빙판도 다시 누를 것이고, 매번 산왕전의 그 침묵의 한 컷 앞에서 가만히 다시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쿠라기와 루카와가 손바닥을 마주치는 그 짧은 컷 앞에서 또 한 번, 한 시대를 함께 지나온 한 사람의 작은 결산이 천천히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