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보러 갈 때만 해도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로, 그저 요즘 화제라기에 한번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가벼운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화면 위에 펼쳐지는 그 압도적인 액션의 영상미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ufotable이라는 제작사가 만들어내는 그 작화의 밀도는 정말 다른 차원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한 컷 한 컷, 혈귀의 기술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넷플릭스를 켜고 귀멸의 칼날 시리즈 전체를 처음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작품에 홀딱 빠져버린 것이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시리즈 전체를 다 보고 무한성편을 다시 떠올리는 동안, 그 화려한 액션 뒤편으로 한 가지 깊은 질문이 천천히 떠올랐다. 이 작품이 끝까지 들려주려는 한 줄은 무엇인가. 그 질문의 한가운데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상현 3, 아카자다.

혈귀가 된다는 것, 그 슬픈 사정들
귀멸의 칼날이라는 작품이 다른 액션물과 분명히 다른 한 가지가 있다. 주인공이 베어야 하는 적, 그러니까 혈귀들이 단순한 악당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은 한 혈귀를 쓰러뜨릴 때마다 그 혈귀가 인간이었던 시절의 한 풍경을 잠깐씩 보여준다. 그가 왜 인간이기를 멈추고 혈귀가 되었는가. 그 한가운데에는 거의 언제나 한 가지 슬픈 사정이 놓여 있다.
이 점이 작품 전체의 결을 결정한다. 모든 혈귀의 근본에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 인간이었을 때 그들이 품었던 욕심, 그리고 그 욕심이 채워지지 못한 자리에서 자라난 한 깊은 원한이다. 작품의 최종 빌런인 키부츠지 무잔만이 그 결에서 벗어나 있다. 무잔은 그저 자기 생존을 위해 끝없이 다른 존재를 도구로 삼는 순수한 악에 가깝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나머지 혈귀들은 모두 한때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그 인간의 마음 안쪽에서 자라난 욕심과 원한이 그들을 끝내 혈귀로 만들었다.
무한성편의 중심에 선 아카자가 정확히 그렇다. 영화는 그가 탄지로와 기유를 상대하는 그 격렬한 전투의 한가운데에서, 그가 인간 하쿠지였던 시절의 한 풍경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그가 무엇을 잃었고, 그 상실이 그의 마음 안쪽에 어떤 원한을 새겨 놓았는가. 그 사연을 다 보고 나면, 그를 단순히 미워하기가 어려워진다. 많은 관객이 이 작품을 보고 "진짜 주인공은 아카자였다"라고까지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
여기서 한 명의 독일 철학자가 떠오른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7년에 펴낸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한 가지 마음의 메커니즘을 정교하게 해부했다. 르상티망(ressentiment). 우리말로는 흔히 원한 또는 앙심으로 옮겨지는 이 프랑스어 단어를 니체는 한 가지 특별한 의미로 사용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 앞에서, 그 무력함을 직접 풀어낼 길이 막힌 한 사람의 마음 안쪽에 천천히 고여 가는 한 가지 독이다. 자기가 약하다는 사실, 자기가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되돌릴 길이 자기에게 없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한자리에 고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은 점점 바깥을 향한 원한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 원한이 끝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잠식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 르상티망은 한 인간을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변형시키는 가장 무서운 한 가지 힘이었다.
귀멸의 칼날의 혈귀들이 정확히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의 화신이다. 그들은 인간이었을 때 무언가를 잃었고, 그 상실 앞에서 무력했으며, 그 무력함이 마음 안쪽에 깊은 원한으로 고였다. 그리고 무잔이 그 르상티망의 한가운데에 한 가지 유혹을 들이민다. 인간이기를 멈추면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혈귀가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쪽에 고인 르상티망에 끝내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한 가지 선택이었던 셈이다. 아카자가 인간 하쿠지에서 혈귀로 변해 가는 그 과정이 니체의 한 페이지를 거의 그대로 화면 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결의 인물을 일본 시대물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바람의 검심을 보고 막스 셸러의 회개론을 빌려 적은 글에서, 살인귀였던 과거를 짊어진 채로 그 무게 위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한 인물 켄신을 다룬 적이 있다. 켄신과 아카자는 묘하게 같은 자리에서 갈라진 두 인물이다. 둘 다 과거에 깊은 상처와 죄를 가진 인물이지만, 켄신은 그 무게를 짊어진 채 속죄의 길로 갔고, 아카자는 그 무게를 르상티망으로 바꾸어 혈귀의 길로 갔다. 같은 출발점에서 한 인물은 회개로, 다른 인물은 원한으로 갈라진 셈이다.
그리고 탄지로라는 한 사람
여기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 탄지로가 왜 그토록 빛나는가가 분명해진다. 탄지로 역시 깊은 상실을 겪은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무잔에게 몰살당했고, 하나 남은 여동생 네즈코마저 혈귀가 되어버렸다. 르상티망이 자라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토양은 없다. 니체의 시선에서 보면, 탄지로야말로 가장 깊은 원한에 잠식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다.
그런데 탄지로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그는 혈귀를 베어야 하는 자기 사명 앞에서도 그 혈귀가 한때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잊지 않는다. 그는 쓰러뜨린 혈귀의 마지막 한 순간에 그 혈귀의 슬픔에 함께 손을 내민다. 적을 미워하는 그 마음과 그 적의 슬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동시에 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탄지로라는 인물의 가장 깊은 한 결이고,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을 끝내 넘어선 한 사람의 모습이다.
니체는 르상티망에 잠식된 인간의 반대편에 한 가지 다른 인간형을 세웠다. 자기에게 닥친 모든 것을, 그 고통까지도 끌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인간. 자기 안쪽에 고이는 원한에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 그 원한을 넘어서 삶 그 자체를 다시 긍정하는 인간이다. 탄지로가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그의 인성과 인품이 그토록 뛰어나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르상티망이라는 가장 깊은 유혹 앞에서 끝까지 그 유혹에 자기를 내어주지 않은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두 편을 기다리며
무한성편은 최종 결전을 그리는 3부작의 첫 편이다. 앞으로 두 편의 극장판이 더 남아 있고, 그 안에서 탄지로와 혈귀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그 마지막을 향해 가는 동안 이 작품이 끝까지 들려주려는 한 줄이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 안쪽에 고이는 욕심과 원한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변형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변형의 유혹 앞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화려한 액션의 한가운데에 그렇게 깊은 한 줄이 들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이 작품에 그토록 홀딱 빠져버린 진짜 이유였는지 모른다. 남은 두 편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래서 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