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옮기는 일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 작업이다. 원작 팬의 마음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매체의 문법으로 다시 짜내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 중에도 "이건 잘 풀렸다"라고 단연 손꼽을 만한 작품이 한 편 있다. 바람의 검심이다.
검술 액션 장면들의 완성도, 사토 타케루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일본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 초기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화면 안에 풀어 놓는 미장센까지, 어느 자리 하나 빠질 데가 없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액션도 미장센도 아니다. 한 인물의 신념 한 줄이다.

살인귀에서 떠돌이 검객으로
영화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본래 막부 말기 조슈번 소속의 자객이었다. 도막파의 그림자 안에서 그가 베어 넘긴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영화는 정확한 숫자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 시절 그가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분명히 알려준다. 히토키리 밧토사이, 인간을 베는 자라는 뜻의 그 이름이 곧 그 시절 그의 정체였다.
메이지 시대로 시간이 흐른 뒤 켄신은 자기 칼을 한 자루의 다른 칼로 바꾼다. 칼날이 반대로 박힌 역날검이다. 휘둘러도 사람의 살을 베지 못하는, 그러나 강한 일격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는 있는 한 자루의 칼. 그가 그 칼을 손에 쥐고 떠돌이 검객으로 떠나면서 한 가지 신념을 자기 자신에게 내건다.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 영화는 그 신념을 든 한 남자가 메이지 사회의 그늘과 마주치며 매번 그 신념을 다시 시험받는 이야기다.
그러나 죽인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켄신의 신념을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가 오늘부터 다시는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가 어제까지 베어 넘긴 사람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그대로 죽어 있고, 그 죽음을 둘러싼 가족과 이웃의 슬픔은 그가 칼을 거꾸로 쥔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켄신의 그 신념은 진짜 속죄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견디기 위한 합리화에 더 가까울까.
이 의심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예전에 무간도 1편을 보고 사르트르의 자기기만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한 사람이 어떤 역할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자기 자유의 무게를 외면하는 자리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떠돌이 검객이라는 외형, 역날검이라는 도구, 그리고 살인 금지라는 단단한 신념. 이 세 가지를 자기에게 두름으로써 켄신은 어쩌면 자기 과거의 무게를 한 단계 더 가벼운 곳으로 옮겨두려 한 것은 아닐까. 자기기만이라는 사르트르의 비판이 켄신의 경우에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런데 한 명의 독일 철학자가 그 자리에 다른 시선을 들이밀어 준다.
막스 셸러가 말한 회개의 진짜 의미
20세기 초의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는 1921년에 펴낸 《회개와 갱생(Reue und Wiedergeburt)》이라는 짧은 글에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한 가지를 짚어낸다. 우리는 보통 회개를 두 가지 중 하나로 이해한다. 첫째는 그저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의 감정이고, 둘째는 자기를 견디기 위한 일종의 자기 합리화다. 그러나 셸러가 보기에 진짜 회개는 그 두 가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셸러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하다. 진짜 회개는 자기가 한 행위를 잊거나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인 사람은 죽었고, 빼앗은 것은 빼앗아진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 과거를 그대로 두고도, 그 과거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가치적 태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할 수 있다. 셸러는 이것을 "정신의 갱생(geistige Wiedergeburt)"이라 불렀다.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과거를 떠안은 한 사람으로서 매일 다시 결단하는 일.
이 시선으로 켄신을 다시 들여다보면 영화의 결이 한층 다르게 읽힌다. 그는 자기가 죽인 사람들을 잊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 곳곳에서 그의 얼굴 위로 잠시 스쳐 가는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가 그 과거를 매일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다. 그가 역날검을 든다는 것은 그 과거가 없는 척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과거가 있는 채로 다른 길을 매일 다시 선택한다는 결단이다. 셸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켄신은 자기 과거를 짊어진 한 사람으로 매일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자기기만이 아니라, 정신의 갱생에 그가 서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인성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여기서 다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켄신은 사면받은 인간인가. 그가 한 일은 결국 용서되어도 되는 일인가. 셸러도 이 지점에서 분명히 선을 긋는다. 회개는 사면이 아니다. 자기를 다시 정함으로써 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열리지만, 그 사람이 한 행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켄신 자신도 영화 내내 자신을 사면된 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떠돌이의 신분에 자신을 두고,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영웅으로 부르는 그 어떤 위치에도 결코 자신을 두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은, 자기 과거의 무게를 잊지 않은 한 사람이 그 무게를 가진 채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매일 보여주는 풍경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신념이 단순한 자기 합리화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은 자기 과거를 가볍게 만들지만, 켄신은 그 반대다. 그는 자기 과거를 매일 다시 무겁게 떠안는 사람이다. 그가 그 무게 위에서 그래도 다시 한 발씩 걸어가는 모습이, 영화가 끝까지 들려주려 한 한 줄에 가장 가까운 답이 아닐까.
다시 들춰볼 시리즈
바람의 검심 시리즈는 분명히 또 한 번 보게 될 것이다. 다음에 다시 누를 때는 액션 장면 안에서 새로운 한 컷이 보일 수도 있고, 메이지 시대의 한 거리 풍경이 더 깊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매번 똑같이 다시 마음에 남는 한 가지는, 자기 과거의 무게를 가진 채로 그래도 한 발 더 내딛는 한 남자의 얼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