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그렇다. 누군가 이 영화의 줄거리를 묻는다면 한 문장으로 끝난다. 사막을 가로질러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이 한 문장짜리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조지 밀러라는 한 노장이 일흔의 나이에 만들어낸 이 영화는, 영화가 이야기가 아니라 운동 그 자체로도 위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대사는 거의 없고, 설명은 더더욱 없다. 그저 황량한 사막 위를 질주하는 차들, 모래폭풍, 불을 뿜는 기타, 끝없이 이어지는 추격. 그 모든 것이 한 덩어리의 거대한 운동이 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관을 나서며 든 생각은 단순했다. 나는 방금 한 편의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질주를 통과해 온 것이다.

한 문장의 줄거리, 두 시간의 질주
영화의 배경은 문명이 무너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다. 물과 기름이 곧 권력인 그 황무지에서, 임모탄 조라는 한 독재자가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는 물을 독점하고, 건강한 여성들을 자기 아내로 가두어 대를 잇게 한다. 영화는 그 임모탄의 사령관 퓨리오사(샬리즈 테론)가 임모탄의 다섯 아내를 자기 트럭에 숨긴 채 탈출하면서 시작된다.
그때부터 영화는 사실상 하나의 긴 추격전이다. 퓨리오사가 아내들을 데리고 자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녹색의 땅을 향해 사막을 질주하고, 임모탄의 군대가 그 뒤를 쫓는다. 우연히 그 질주에 휘말린 한 남자 맥스(톰 하디)가 합류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한 방향으로의 끝없는 질주이고, 후반부는 그 질주가 다시 방향을 틀어 돌아오는 또 한 번의 질주다.
이 단순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힘은 압도적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차량들의 충돌, 모래폭풍 속의 추격, 긴 장대에 매달려 차에서 차로 건너뛰는 전사들. 이 모든 것을 조지 밀러는 가능한 한 실제로 찍었다. 그 실제의 운동이 화면 위에서 만들어내는 질감은, 어떤 컴퓨터 그래픽도 흉내 낼 수 없는 한 가지 생생함을 가진다.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
이 끝없는 질주를 들여다보다가,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가 떠오른다. 질 들뢰즈다. 예전에 F1 더 무비를 보고 들뢰즈의 유목민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한 인간의 자유를 다룬 적이 있다. 분노의 도로는 같은 들뢰즈의 또 다른 한 개념을 정확히 화면 위에 펼쳐 보인다. 탈주선(ligne de fuite)이다.
들뢰즈가 동료 가타리와 함께 다듬은 이 개념은 이렇다. 모든 체계는 사람들을 일정한 자리에 가두고 일정한 방식으로 살게 만든다. 임모탄의 지배 체제처럼, 한 권력은 사람들을 자기 질서 안에 단단히 붙들어 둔다. 그런데 그 체계 안에는 언제나 한 가지 선이 존재한다. 그 질서를 뚫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선, 들뢰즈는 그것을 탈주선이라 불렀다. 탈주선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가 규정한 모든 좌표를 벗어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뻗어 나가는 한 가지 운동이다.
퓨리오사의 질주가 정확히 그 탈주선이다. 그는 임모탄의 체제 안에서 사령관이라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질서에 순응하면 안전한 삶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다섯 아내를 데리고, 정해진 모든 좌표 바깥으로 트럭을 몰아 사막을 가로지른다. 그 직선의 질주가 화면 위에 그려내는 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의 한 이미지다. 체제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한 줄기 운동.
녹색의 땅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의 가장 깊은 한 줄은 그 다음에 온다. 퓨리오사가 그토록 향하던 녹색의 땅, 그 희망의 목적지가 사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가 평생 기억 속에 품어온 그 약속의 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탈주의 목적지가 환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통의 영화라면 절망으로 빠질 것이다. 그런데 분노의 도로는 다른 선택을 한다. 퓨리오사와 맥스는 목적지가 사라졌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다시 방향을 튼다. 자기들이 도망쳐 나온 그 임모탄의 요새로, 이번에는 그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되돌아간다. 도착할 곳이 없다면, 그 질주 자체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통찰이 완성된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의 핵심은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탈주선은 목적지를 향한 선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선이다. 어떤 약속의 땅에 닿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 움직이는 그 운동 안에서 이미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녹색의 땅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탈주의 실패가 아니다. 퓨리오사의 진짜 탈주는 목적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자리를 박차고 나와 끝까지 움직였다는 그 운동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전체가 줄거리보다 운동 그 자체로 위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분노의 도로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탈주라는 한 가지 운동을 관객이 몸으로 통과하게 만드는 영화다. 우리가 두 시간 동안 그 질주에 몸을 맡기는 동안, 우리 자신도 잠시 모든 정해진 좌표를 벗어나 한 줄기 탈주선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질주가 곧 자유였던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다시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자유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자유에 대한 어떤 대사도, 어떤 설교도 없다. 다만 정해진 자리를 박차고 나와 끝까지 질주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질주를 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낀다.
F1의 소니가 서킷을 떠돌고, 타짜의 고니가 도박판을 떠돌았다면,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는 사막을 질주한다. 무대는 모두 다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같은 한 가지다. 한 곳에 매이지 않고 끝까지 움직이는 삶의 그 강렬한 자유. 어쩌면 내가 이런 영화들에 거듭 끌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정해진 자리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만의 탈주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삶에 대한 한 가지 동경. 분노의 도로는 그 동경을 두 시간의 질주로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