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아이덴티티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는 영화였다면, 본 슈프리머시는 그렇게 찾은 자기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영화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이 영화에서 감독은 더그 라이먼에서 폴 그린그래스로 바뀌는데, 그 교체와 함께 영화의 결도 한층 무거워진다. 1편의 핸드헬드 카메라가 만들어낸 그 사실적인 긴장이 2편에서는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밀도로 끌어올려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1편과 가장 크게 달라지는 지점은 액션이 아니라 주인공의 마음이다. 1편의 본이 자기 과거를 모른 채 그것을 추적하는 사람이었다면, 2편의 본은 자기 과거를 알게 된 채 그 과거의 무게와 마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무게의 한가운데에 한 가지가 놓여 있다. 죄책감이다.

마리의 죽음,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추적
영화는 한 죽음에서 시작된다. 1편에서 본과 함께 도망쳤고 그의 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마리가, 본을 노린 한 저격수의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 인도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두 사람의 평온이 그 한 발로 무너진다. 본은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다시 한 번 자기 과거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설상가상으로 본은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한 범죄의 누명까지 쓴다. CIA의 작전이 실패하면서 그 배후로 본이 지목되고, 그는 다시 한 번 전 세계의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된다.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본이 그 누명을 벗고 자기를 노리는 자들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짜로 향하는 곳은 그 음모의 진실이 아니라, 본이 자기 과거에 저지른 한 가지 일과 마주하는 그 순간이다.
추적의 끝에서 본은 자기가 기억하지 못했던 한 가지 진실을 마주한다. 암살자로 활동하던 시절, 그가 처음으로 수행한 임무가 한 부부를 살해하는 것이었다는 사실. 네스키라는 이름의 그 부부를 죽인 것이 바로 자기였다는 진실이 본의 기억 속에서 천천히 떠오른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기 과거의 가장 깊은 곳에, 무고한 두 사람의 죽음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리쾨르가 말한 빚으로서의 기억
1편을 다룰 때 존 로크의 시선을 빌린 적이 있다. 본 아이덴티티를 보고 로크의 인격동일성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기억이 한 인격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로크의 통찰을 다룬 적이 있다. 그런데 2편의 본이 마주한 상황은 로크의 시선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본은 이제 기억을 되찾았다. 문제는 그 되찾은 기억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이다. 여기서 로크를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가 떠오른다. 폴 리쾨르다.
리쾨르는 로크의 통찰을 받아들이면서도 한 가지를 더했다. 정체성은 단순히 기억이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여러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때다. 리쾨르는 이것을 서사적 정체성이라 불렀다. 우리는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면서,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자기 과거에 책임을 지면서, 비로소 한 사람의 자기가 된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던진 가장 깊은 한 줄은 기억에 관한 것이다. 그는 기억이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기억은, 한 가지 빚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 기억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진 한 가지 빚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빚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 그것이 한 인간이 자기 과거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라고 리쾨르는 말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 빚을 인정하는 것이다.
본 슈프리머시의 본이 정확히 그 빚 앞에 선다. 그는 네스키 부부를 죽인 자기 과거를 기억해냈고, 그 기억은 그에게 갚아야 할 한 가지 빚으로 남는다. 1편의 본이 자기 과거를 추적하는 사람이었다면, 2편의 본은 그 추적의 끝에서 발견한 자기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모스크바, 한 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영화의 가장 깊은 한 장면은 화려한 액션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조용한 한 아파트에서 펼쳐진다. 본은 자기가 죽인 네스키 부부에게 한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그 딸은, 자기 부모가 동반 자살했다고 알고 살아왔다. 본은 모스크바의 그 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그 딸에게 진실을 말한다. 당신의 부모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을 죽인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이 고백은 본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를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그런데도 본은 그 진실을 말한다. 왜일까. 리쾨르의 시선에서 보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본은 자기가 그 딸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것이다. 자기가 그녀의 부모를 죽였다는 그 진실을 그녀가 알 권리, 그것이 본이 갚아야 할 빚이었다.
이 장면이 본 슈프리머시를 단순한 첩보 액션 이상으로 만든다. 본은 자기 누명을 벗는 일보다, 자기가 죽인 사람의 딸에게 진실을 말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속죄를 위해 그 먼 길을 간다. 자기 과거의 가장 어두운 한 부분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 빚을 자기 손으로 갚으려는 것. 리쾨르가 말한 그 책임의 기억이 이 한 장면 안에 온전히 담겨 있다.
자기를 책임진다는 것
본 슈프리머시는 그래서 1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곳으로 간다. 1편이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2편은 그렇게 찾은 나의 과거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다. 본은 자기 정체성을 기억 속에서 찾았지만, 그 기억 속에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갚을 수 없는 빚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빚을 외면하는 대신 정직하게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리쾨르가 옳다면, 한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자기 과거의 빛나는 부분만을 끌어안을 때가 아니다. 자기 과거의 가장 어두운 부분, 다른 사람에게 진 빚까지도 자기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책임을 질 때다. 본이 모스크바의 그 딸에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한 명의 온전한 자기가 된다. 도망치는 암살자가 아니라, 자기 과거의 빚을 책임지는 한 인간으로. 본 슈프리머시는 화려한 추격의 외피 안에, 그 조용하고 깊은 책임의 한 순간을 끝까지 숨겨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