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황정민3

베테랑 — 어이가 없네, 그리고 호네트가 말한 무시와 인정투쟁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믿고 본다고 예전에 한 번 적은 적이 있다. 베테랑은 그 믿음의 가장 단단한 토대가 된 영화다. 1340만 명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그러니까 한국 사람 넷 중 하나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그 숫자가 이미 한 가지를 말해준다. 이 영화에는 그 많은 사람의 가슴을 동시에 건드린 한 가지가 분명히 들어 있다.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저 통쾌함이라고 생각했다. 안하무인의 재벌 3세가 끝내 형사의 손에 잡히는 그 사이다 같은 결말.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조금 달랐다. 베테랑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단순한 권선징악의 통쾌함이 아니라, 그 통쾌함 밑에 깔린 한 가지 더 깊은 감정에 있었다. 무시당한 자의 분노다. 조태오와 서도철, .. 2026. 6. 17.
공작 — 흑금성이라는 가면, 그리고 고프먼이 말한 무대 위의 자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묘한 무게를 가진다.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한 인물의 선택이 실제로 누군가가 살아낸 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등 뒤에서 가만히 따라온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 그런 영화다.이 영화는 1990년대 중후반, 흑금성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북에 침투했던 한 실존 안기부 요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 고위층에 접근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핵 개발 정보에 다가가는 한 남자. 총격도 격투도 거의 없는 이 조용한 첩보 영화가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유는, 그 모든 긴장이 오직 한 가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가면이다. 한 인간이 자기 진짜 얼굴을 완벽하게 숨긴 채 다른 한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는 그 끝없는 긴장.흑금성이라는 가면공작의 주.. 2026. 6. 15.
서울의 봄 — 1979년 12월의 그 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오랜만에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를 보았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 한밤중에 한국 현대사의 한 큰 흐름이 결정적으로 굳어지던 그 풍경을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안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영화를 보기 전부터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그런데 영화는 그 분명한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미 닫혀 있는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질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1979년 12월의 그 한밤영화의 무대는 1979년 12월 12일의 밤이.. 2026.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