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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아이덴티티 — 기억을 잃은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로크가 말한 인격동일성 한 남자가 지중해 바다 위에 떠 있다. 어부들이 그를 건져 올렸을 때, 그의 등에는 총알이 박혀 있고 엉덩이 피부 밑에는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가 새겨진 작은 장치가 들어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자기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본 아이덴티티는 이 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자기 이름조차 모르는 한 남자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이 영화가 첩보 액션의 한 시대를 연 작품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화려한 장비도 멋진 슈트도 없이, 핸드헬드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그 거칠고 사실적인 액션은 이후 수많은 첩보물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장 깊게 마음에 남은 것은 그 액션이 아니었다. 제목 그 자체, 아이덴티티라는 한 단어가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를 나로 만드.. 2026. 6. 21.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퓨리오사의 질주, 그리고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 어떤 영화는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그렇다. 누군가 이 영화의 줄거리를 묻는다면 한 문장으로 끝난다. 사막을 가로질러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이 한 문장짜리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조지 밀러라는 한 노장이 일흔의 나이에 만들어낸 이 영화는, 영화가 이야기가 아니라 운동 그 자체로도 위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대사는 거의 없고, 설명은 더더욱 없다. 그저 황량한 사막 위를 질주하는 차들, 모래폭풍, 불을 뿜는 기타, 끝없이 이어지는 추격. 그 모든 것이 한 덩어리의 거대한 운동이 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관을 나서며 든 생각은 단순했다... 2026. 6. 20.
범죄도시 — 마석도의 주먹, 그리고 벤야민이 말한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 범죄도시 시리즈는 이제 한국 액션 영화의 한 상징이 되었다. 마동석이라는 한 배우의 거대한 주먹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그 주먹 한 방에 악당이 나가떨어질 때마다 영화관 전체가 통쾌함으로 들썩인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2017년의 범죄도시1이었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가리봉동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는 장첸이라는 한 잔혹한 범죄자, 그리고 그를 쫓는 괴물 같은 형사 마석도. 두 사람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그 압도적인 긴장과, 마석도의 주먹이 장첸을 제압하는 그 마지막의 통쾌함. 분명히 잘 만든 오락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통쾌함 한가운데에서 한 가지 묘한 질문이 떠올랐다. 마석도가 장첸을 제압하는 그 방식은, 과연 장첸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마석도의.. 2026. 6. 19.
실미도 — 만들어지고 버려진 사람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 한 영화가 천만 명을 모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2003년의 한국은 실미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긴 이 영화는 단순한 흥행 기록을 넘어,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정면으로 끌어올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실미도는 1968년에 창설되었던 한 비밀 부대, 흔히 684부대라 불리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무겁다.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그 비극이 누군가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한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사실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가슴에 남는다. 국가가 한 무리의 인간을 만들어내고, 쓰고, 끝내 지워버린 그 이야기.만들어지고 버려진 사람들영화의 시작은 한 가지 모집에서 .. 2026. 6. 18.
베테랑 — 어이가 없네, 그리고 호네트가 말한 무시와 인정투쟁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믿고 본다고 예전에 한 번 적은 적이 있다. 베테랑은 그 믿음의 가장 단단한 토대가 된 영화다. 1340만 명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그러니까 한국 사람 넷 중 하나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그 숫자가 이미 한 가지를 말해준다. 이 영화에는 그 많은 사람의 가슴을 동시에 건드린 한 가지가 분명히 들어 있다.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저 통쾌함이라고 생각했다. 안하무인의 재벌 3세가 끝내 형사의 손에 잡히는 그 사이다 같은 결말.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조금 달랐다. 베테랑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단순한 권선징악의 통쾌함이 아니라, 그 통쾌함 밑에 깔린 한 가지 더 깊은 감정에 있었다. 무시당한 자의 분노다. 조태오와 서도철, .. 2026. 6. 17.
군체 — 가장 신선한 좀비, 그리고 뒤르켐이 말한 집합의식 금요일이었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나와 안산 CGV의 17시 30분 회차를 예매해두고, 평소처럼 혼자 영화관에 앉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를 보러 가는 길이었고, 솔직히 기대가 적지 않았다.기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이라는 한 편의 영화로 한국 좀비물의 새 장을 연 사람이다. 그 이후의 작품들이 부산행만큼의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번 군체는 소재 자체가 분명히 신선했다. 좀비들이 서로 연동되어 정보를 교류하고, 그 교류를 통해 실시간으로 진화한다는 설정. 대장 좀비가 다른 좀비들을 조종한다는 그 발상. 기존 좀비물의 문법을 한 번 비트는 이 컨셉만으로도 영화관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한 가지 묘한 감정이 남.. 2026.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