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1 타짜를 스무 번 넘게 봤다 — 고니의 자유, 그리고 파스칼이 말한 인생이라는 내기 같은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짜가 나에게 그런 영화다. 정확히 몇 번을 봤는지 이제는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고, 웬만한 대사는 그냥 줄줄 외운다.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도 지금 어떤 장면이 지나가고 있는지 다 안다. 최동훈 감독의 여러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짜는 단연 으뜸의 자리에 있다.언젠가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가. 처음 떠오른 답은 단순했다. 도박으로 돈을 따는 그 짜릿함, 화투패가 뒤집히는 한 순간에 분출되는 도파민. 분명히 그 재미가 영화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스무 번을 넘게 보면서 그 답은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내가 이 영화를 이토록 오래 곁에 두는 진짜 이유는 도박의 짜릿함이 아니라.. 2026. 6. 13.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 아카자의 원한, 그리고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보러 갈 때만 해도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로, 그저 요즘 화제라기에 한번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가벼운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화면 위에 펼쳐지는 그 압도적인 액션의 영상미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ufotable이라는 제작사가 만들어내는 그 작화의 밀도는 정말 다른 차원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한 컷 한 컷, 혈귀의 기술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넷플릭스를 켜고 귀멸의 칼날 시리즈 전체를 처음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작품에 홀딱 빠져버린 것이 오랜만이었다.그런데 .. 2026. 6. 12.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미야기 료타의 과거, 그리고 다니자키가 말한 그늘의 미학 슬램덩크는 나에게 단순한 만화 한 편이 아니다. 학창 시절 한참을 정독한 32권을 머리에 다 담은 채로 한 시대를 지나온 한 사람에게, 그 작품의 영화화 소식은 분명히 한 가지 떨림이었다. 그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국에 개봉한 날 가장 먼저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며칠 사이에 세 번을 다시 보았다. 일본어 원판 한 번, 한국어 더빙판 두 번. 그렇게 같은 영화를 세 번 보고 나서야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영화는 슬램덩크의 영화가 아니라, 슬램덩크 이후를 위한 한 편의 다른 작품이라는 것.영화는 그 점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우리가 30년 가까이 주인공으로 알아왔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니라, 늘 화면 한구석에서 빠른 드리블로 코트를 가로지르던 한 작은 가드, 미야기 료타가 이 영화의 시점이 .. 2026. 6. 11. 전지적 독자 시점 — 원작을 모르고 본 한 관객의 호평, 그리고 야우스의 기대 지평 가끔 평론과 분명히 다른 결로 한 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있다. 모두가 별로라고 입을 모으는 영화가 한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들어오는 경우. 전지적 독자 시점이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8억 뷰의 웹소설 원작이고, 거대한 팬덤이 있었고, 그래서 영화화 소식부터 기대와 우려가 컸던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오자 평단도 원작 팬도 거의 한목소리로 실망을 토로했다. 평점이 떨어지고, 후기마다 각색의 어색함과 CG의 미흡함이 지적되었다.그런데 나는 의외로 재미있게 봤다.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원작 웹소설도 웹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펼쳐지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 채로, 그저 한 편의 한국 판타지 액션 영화를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다.. 2026. 6. 10. 서울의 봄 — 1979년 12월의 그 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오랜만에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를 보았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 한밤중에 한국 현대사의 한 큰 흐름이 결정적으로 굳어지던 그 풍경을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안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영화를 보기 전부터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그런데 영화는 그 분명한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미 닫혀 있는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질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1979년 12월의 그 한밤영화의 무대는 1979년 12월 12일의 밤이.. 2026. 6. 9. 참교육 — 사이다의 정체, 그리고 푸코가 말한 사라진 처벌의 스펙터클 주말 내내 한 드라마를 다 본 적이 오랜만이다. 그것도 한 번에 다 푸는 OTT 시리즈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서, 토요일 오후에 시작해 일요일 밤까지 10화를 거의 다 봤다. 넷플릭스의 신작 참교육이다.다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사이다. 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 있었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통쾌하게 한 방씩 날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그래, 그렇지!"라는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우리는 왜 이런 식의 이야기 앞에서 이렇게 시원해할까. 정말로 한국 사회에 교권보호국 같은 기관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그 시원함의 진짜 정체일까.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가 1975년에 쓴 한 권의 책이 .. 2026. 6. 8. 이전 1 2 3 4 5 6 7 8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