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1 하얼빈 — 안중근의 그릇, 그리고 맹자가 말한 대장부 오랜만에 한국 사극을 봤다. 그것도 안중근이라는,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한 영웅의 이야기다. 현빈이 안중근 역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막상 영화를 본 뒤에는 그 캐스팅이 정말 잘 어울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일어난 그 결정적인 한 발의 총성도 아니었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어떤 액션 장면도 아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비추는 한 장면, 그러니까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는 그 짧은 한 결정이었다.신아산의 전투, 그리고 한 사람의 결정영화 초반에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 2026. 6. 7.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영화 앞에서 잠든 한 관객, 그리고 손택의 시선 이번 글은 좀 다른 결로 시작해야겠다. 솔직히 말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면서 영화 중간에 잠이 들었다.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작품이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라기에 Wavve에서 돈까지 주고 본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가장 먼저 떠오른 한 마디는 단 한 줄이었다. "내가 영화를 볼 줄 모르는 건가?"그래서 이번 글은 칭찬보다는 의문에 가깝다. 평론가가 극찬하고 한 관객은 잠들었다면, 그 영화에 대한 진짜 평가는 어느 쪽인가. 수전 손택이라는 한 비평가의 시선을 빌리면 이 의문에 한 가지 답을 받을 수 있다.평론가는 극찬했고, 나는 잠들었다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25년 신작이다. 한물간 혁명가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16년 만에 .. 2026. 6. 5. 바람의 검심 — 켄신의 신념은 자기 합리화인가, 진짜 속죄인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옮기는 일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 작업이다. 원작 팬의 마음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매체의 문법으로 다시 짜내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 중에도 "이건 잘 풀렸다"라고 단연 손꼽을 만한 작품이 한 편 있다. 바람의 검심이다.검술 액션 장면들의 완성도, 사토 타케루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일본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 초기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화면 안에 풀어 놓는 미장센까지, 어느 자리 하나 빠질 데가 없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액션도 미장센도 아니다. 한 인물의 신념 한 줄이다.살인귀에서 떠돌이 검객으로영화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본래 막부 말기 조슈번 소속의 자객이었다. 도막파의 그림자 안에서 .. 2026. 6. 4. 골드랜드 — 김희주의 흑화, 그리고 짐멜이 말한 돈의 진짜 무게 평소에는 영화를 주로 보지만, 가끔 OTT의 짧은 시리즈에 손이 가는 날이 있다. 디즈니+의 골드랜드도 그렇게 만난 작품이다. 10부작이라는 분량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박보영이 사랑스러운 이미지 위에 다른 결을 한 번 그려본다는 사실이 호기심을 끌었다.10화를 다 본 끝에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김희주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손에 쥐었고,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프랑스 남부의 한 풍경 안에 마침내 머물게 되었는데, 그 표정 어디에도 평온이 보이지 않았다. 1,500억 원이라는 한 덩어리의 금이 한 사람의 일상을 어디까지 갈아내릴 수 있는가, 골드랜드가 10화 동안 보여주려 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다.김희주, 돈이 한 사람을 갈아내리는 속도골드랜드의 주인공 김희주(박보영)는.. 2026. 6. 1. 퓨리 — 워대디의 마지막 자리, 그리고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 브래드 피트가 나오면 일단 보게 된다. 퓨리도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처음 봤을 때는 2차대전 액션 영화 한 편을 본다는 마음이었는데, 영화가 끝났을 때 손에 남은 것은 액션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끝까지 함께한 다섯 사람의 얼굴이었다.퓨리가 끝나고 한참 뒤에도 분명해진 것 한 가지가 있다. 이 영화는 액션 영화의 옷을 입은 우정 영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우정 영화의 옷 안쪽에 한 가지가 더 들어 있다.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액션이라는 옷, 우정이라는 본문퓨리는 1945년 독일 영토 안쪽, 2차대전 유럽 서부전선의 마지막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미군 셔먼 전차 한 대 안에 다섯 명의 승무원이 있다. 차장 워대디 돈 콜리어(브래드 피트). 기독교인 보이드 "바이블" 스완(샤이아 라보프). .. 2026. 5. 29. 월드워Z 다시 보고 — 좀비라는 이름의 페스트, 그리고 카뮈 좀비 영화 중에 단연 1등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월드워 Z를 꼽는다. 넷플릭스에 떠 있을 때마다 자꾸 다시 누르게 되고, 어느새 몇 번을 봤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봤다.이 영화만큼은 왜 그렇게 특별한가? 처음에는 그 답을 잘 몰랐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분명해진 것은, 월드워 Z가 좀비 영화의 옷을 입은 다른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알베르 카뮈가 1947년에 쓴 《페스트》와 같은 결을 가진 영화라고 해도 좋다.평범한 가장이 다시 직업으로 돌아간다는 것월드워 Z의 주인공 제리 레인(브래드 피트)은 흔한 액션 영웅이 아니다. 첫 장면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시리얼을 따라주고 아내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한 가정의 아빠다. 그러나 그가 한때는 UN의 위기조사관이었고, 가족과 더 많은 .. 2026. 5. 28. 이전 1 ··· 3 4 5 6 7 8 9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