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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 — 소녀 한 명과 수십 명의 목숨, 그리고 왈저가 말한 정의로운 전쟁

by Life philosophy 2026. 7. 14.

어떤 영화는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전쟁 영화의 한 정점에 오른다. 아이 인 더 스카이가 그렇다. 이 영화에는 참호도, 돌격도, 장렬한 전사도 없다. 대신 영국의 회의실과 미국의 드론 조종실, 그리고 케냐의 한 골목을 오가며, 단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그 팽팽한 시간만이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질문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이 영화는 숨 막히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명료하다. 영국, 미국, 케냐 세 나라가 오랫동안 추적해온 테러 조직을 드론으로 제거하려 한다. 그런데 감시 드론이 포착한 영상 속에서, 이 조직이 자살 폭탄 테러를 준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생포 작전은 즉시 사살 작전으로 바뀐다. 그러나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순간, 폭발 반경 안으로 한 소녀가 들어온다. 은신처 담벼락 앞에서 빵을 파는 어린 소녀 알리아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 앞에 하나의 저울이 놓인다. 한쪽에는 이 소녀의 목숨이, 다른 한쪽에는 테러로 죽을 수십 명의 목숨이 올라간다.

 

영화 아이 인더 스카이 포스터

저울 위에 올려진 두 생명

영화의 긴장은 이 저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갈등에서 나온다. 작전을 지휘하는 파월 대령은 지금 당장 미사일을 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녀 한 명이 희생되더라도, 그 테러를 막아 수십 명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사일을 실제로 발사해야 하는 드론 조종사 와츠 중위는 발사 보류를 요청한다. 그의 화면 안에는 그 소녀가 살아 움직이고 있고, 그는 자기 손으로 그 아이를 죽이는 일을 견딜 수 없다.

이 갈등은 단순히 개인 성격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생명을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의 충돌이다. 한쪽은 숫자로 계산한다. 한 명보다 수십 명이 크다는 것. 다른 한쪽은 눈앞의 그 한 사람을 본다. 저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는 것. 이 두 태도 사이에서 영화는 어느 한쪽의 손을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

이 딜레마는 낯설지 않다. 예전에 미 비포 유를 보고 칸트의 의무론과 밀의 공리주의를 빌려 적은 글에서, 한 생명을 둘러싼 원리와 결과의 충돌을 다룬 적이 있다. 그 글이 한 개인의 죽음을 둘러싼 윤리를 다뤘다면, 아이 인 더 스카이는 같은 충돌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으로 밀어붙인다. 국가가 한 개인의 생명을 저울에 올려 계산하는 그 순간의 윤리를.

왈저가 말한 정의로운 전쟁

이 전쟁 속 윤리의 문제를 가장 깊이 파고든 한 사람이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다. 그는 《정의로운 전쟁과 부정의한 전쟁(Just and Unjust Wars)》에서, 전쟁에도 지켜야 할 도덕적 원칙이 있다는 것을 정교하게 논증했다. 흔히 정전론이라 불리는 그의 사상이다.

왈저의 핵심 원칙 중 하나가 비전투원 면책이다. 전쟁에서 무기를 든 전투원과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며, 민간인은 결코 공격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녀 알리아는 완벽한 비전투원이다. 그저 빵을 파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왈저의 원칙에 따르면, 이 아이는 절대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왈저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다. 이중 효과의 원칙이다. 전쟁에서 정당한 군사 목표를 공격할 때,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견되는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왈저는 이런 부수적 피해가 무조건 금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만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이 목표가 아니라 부수적 결과여야 하고, 그 군사적 목표가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왈저가 특히 강조한 것은 이 마지막 조건이다. 군인은 자기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간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더 큰 위험과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아이 인 더 스카이가 그토록 팽팽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왈저가 말한 그 어려운 조건들을 실시간으로 저울질하고 있다. 테러를 막는다는 목표는 정당한가. 소녀의 죽음은 의도된 것인가 부수적인 것인가.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다했는가. 파월 대령이 부하를 닦달해 소녀의 사망 확률을 낮춰 계산하게 만드는 그 불편한 장면은, 이중 효과의 원칙이 현실에서 얼마나 쉽게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는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아무도 누르고 싶어 하지 않는 버튼

이 영화가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지점은, 그 누구도 이 결정의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드론 조종사는 상관에게 결정을 미루고, 파월 대령은 정치인들에게 법적 승인을 요청하고, 정치인들은 다시 상급자에게, 그리고 또 다른 나라의 각료에게 그 결정을 떠넘긴다. 미사일 발사 버튼 하나를 누르기 위해, 결정은 대륙을 건너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끝없이 넘겨진다.

이 책임 회피의 풍경을 다른 영화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본 얼티메이텀을 보고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이 되어 자기 행위의 무게를 외면하는 인간을 다룬 적이 있다. 아이 인 더 스카이의 인물들도 그 시스템 안에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그럼에도 이 인물들이 끝까지 그 무게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책임을 떠넘기면서도 괴로워하고, 결정을 미루면서도 그 소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만약 이것이 그저 비디오 게임 화면이었다면 누구든 주저 없이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녀가 실제로 살아 있는 한 인간임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버튼 하나가 그토록 무겁다.

유리창 너머의 얼굴

영화의 결말에서, 결국 미사일은 발사된다. 테러는 저지되지만 소녀 알리아는 목숨을 잃는다. 다수를 위해 한 명이 희생된 것이다. 공리주의적 계산으로 보면 이것은 옳은 결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그 결정을 승리로 그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의 얼굴에는 어떤 승리감도 없다. 오직 자기들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무겁고 서늘한 자각만이 남는다.

왈저가 정전론을 통해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이 그것인지 모른다. 전쟁에서 어떤 결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 해도, 그 결정이 앗아간 생명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소녀 한 명의 죽음은 수십 명을 살렸다는 계산으로 상쇄되지 않는다. 그 아이의 생명은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였고, 그것을 저울에 올린 사람들은 그 무게를 평생 짊어져야 한다. 아이 인 더 스카이는 그 무게를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나눠 지운다.

이 영화는 알란 릭맨의 유작 중 하나로 남았다. 극 중에서 그가 연기한 벤슨 장군이 마지막에 남기는 한 마디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전쟁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 버튼을 누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는 그 서늘한 통찰.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첨단 기술로 무장한 현대전의 한복판에서도, 결국 변하지 않는 전쟁의 본질을 응시한다. 그것은 언제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저울에 올리는 일이며, 그 저울 앞에서 인간은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