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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

시크릿 에이전트 — 반어법의 제목, 그리고 리쾨르가 말한 기억의 의무

by Life philosophy 2026. 7. 10.

어떤 영화는 제목이 곧 한 편의 반어법이다.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렇다. 이 제목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화려한 첩보 액션을 떠올린다. 비밀 요원, 총격전, 음모와 반전. 그러나 브라질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그 모든 기대를 정면으로 배신한다. 여기에는 멋진 스파이도, 통쾌한 액션도 없다. 대신 한 시대의 서늘한 공기가, 그 시대를 살아낸 한 남자의 침묵이 두 시간 반 내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제목이 반어법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첩보 요원이 아니라, 그저 자기 이름을 숨긴 채 살아남아야 했던 한 평범한 인간이다. 그가 비밀요원처럼 이름을 버리고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은 어떤 화려한 임무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시크릿 에이전트라는 그 장르적 제목 아래에서, 영화가 진짜로 들려주는 것은 한 국가가 자기 국민에게 저지른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을 둘러싼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다.

영화 시크릿에이전트 포스터

1977년, 해악이 만연하던 시대

영화의 배경은 1977년 브라질이다. 군사 독재가 나라를 짓누르던 시절, 공학 기술자였던 마르셀루는 권력과 자본의 이해에 맞섰다는 이유로 제거 대상이 된다. 그는 이름을 버리고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며, 카니발의 열기로 들끓는 고향 헤시피로 돌아온다. 어린 아들과 재회하기 위해서, 그리고 강제로 지워진 원주민 어머니의 기록을 찾기 위해서.

영화가 인상적인 것은 이 시대를 그리는 방식이다. 감독은 독재라는 단어도, 군사정권을 상징하는 어떤 이미지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오프닝 자막은 그저 이 시대를 두고 한 단어로 요약한다. 해악이 만연하던 시대. 감독은 1977년 브라질에서 실제로 벌어진 그 끔찍한 폭력들을,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축소된 언어로 표현했다. 그 절제된 표현이 오히려 그 시대의 공포를 더 서늘하게 전한다. 봉사를 입에 달고 사는 경찰들이 평범한 시민의 목숨을 소리 없이 앗아가고, 자본가들이 불의에 맞서는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아무렇지 않게 찍는 세계. 폭력이 범죄가 아니라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작동 방식이 되어버린 시대. 그것이 영화가 음미하듯 그려내는 1977년의 브라질이다.

리쾨르가 말한 기억의 의무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그 시대 자체보다, 그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있다. 여기서 한 명의 철학자가 떠오른다. 프랑스의 폴 리쾨르다. 예전에 본 슈프리머시를 보고 리쾨르의 기억의 빚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그의 사상을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다룬 것이 한 개인이 자기 과거에 진 빚을 어떻게 책임지는가였다면, 시크릿 에이전트는 같은 리쾨르의 통찰을 개인이 아닌 한 사회 전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리쾨르는 말년의 대작 《기억, 역사, 망각(La mémoire, l'histoire, l'oubli)》에서 한 사회가 자기 과거를 어떻게 다루는가라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핵심 통찰은 이렇다. 한 사회에게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다. 특히 그 과거가 폭력과 불의로 얼룩진 것일 때, 그것을 기억하는 일은 그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의 빚이다. 리쾨르는 이것을 기억의 의무(devoir de mémoire)라 불렀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과거를 덮어버리는 것은, 그 과거의 희생자들을 두 번 배신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동시에 한 가지 위험을 경고했다. 사회는 종종 불편한 과거를 기억하는 대신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 망각은 자연스럽게 잊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우는 강요된 망각이다. 한 사회가 자기가 저지른 폭력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것을 없었던 일처럼 덮어버리는 것. 리쾨르가 보기에 이 강요된 망각이야말로 한 사회가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곪게 만드는 가장 큰 위험이었다.

브라질의 역사가 정확히 그 강요된 망각의 사례다. 브라질은 민주화 과정에서 1979년 사면법을 제정해, 독재 시절 국가 폭력을 주도한 군인과 경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브라질은 불쾌한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기억상실증을 택한 국가가 되었다.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토록 서늘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영화는 그 강요된 망각에 맞서, 지워진 기억을 스크린 위에 다시 불러내는 한 편의 저항이다.

지워진 기록을 찾는 남자

마르셀루가 영화 내내 집요하게 찾는 것은 자기 원주민 어머니의 지워진 기록이다. 국가가 강제로 삭제한 그 기록을 되찾으려는 그의 몸부림은, 리쾨르가 말한 기억의 의무를 한 개인의 차원에서 실천하는 행위다. 그는 국가가 없었던 일로 만들려는 과거를, 자기 손으로 붙들어 기억하려 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 개인의 기억 투쟁에 한 가지 비극적인 그림자를 겹쳐놓는다. 마르셀루의 어린 아들 페르난두가 엄마의 얼굴을 점점 잊어가는 모습이다. 한 세대가 지워진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들려 애쓰는 동안, 다음 세대는 그 기억을 자연스럽게 잃어간다. 리쾨르가 경고한 세대를 건너뛰는 기억의 단절이 이 부자의 모습 안에 응축되어 있다.

이 단절은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가장 서늘하게 드러난다. 과거 한 시대의 문화를 담았던 영화관이 헐리고, 그 자리에 현대식 헌혈 센터가 들어선다. 부모 세대가 시대를 위해 흘린 뜨거운 피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왜곡과 망각의 차가운 피를 수혈받는 자식 세대가 무감각하게 서 있다. 영화는 이 한 장면으로, 강요된 망각이 어떻게 한 사회의 다음 세대를 자기 역사로부터 단절시키는가를 조용히 폭로한다.

우리에게 닿는 한 편의 시대극

브라질의 이 이야기가 한국의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국 역시 군사 독재와 국가 폭력의 시대를 지나왔고,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청산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여전히 서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서울의 봄을 보고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을 빌려 적은 글에서, 한국 현대사의 국가 폭력을 다룬 적이 있다. 서울의 봄이 그 폭력이 벌어지던 순간을 그렸다면, 시크릿 에이전트는 그 폭력이 지나간 뒤에 남은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그린다. 국경과 시대는 다르지만, 두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만난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저지른 폭력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시크릿 에이전트가 위대한 영화인 이유는, 이 무거운 주제를 설교하듯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저 1977년 브라질의 공기와 질감을 정교하게 복원하고, 그 시대를 살아낸 한 남자의 침묵을 조용히 따라간다. 관객은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았어도, 영화가 음미하듯 펼쳐 보이는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강요된 망각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시크릿 에이전트라는 그 반어적인 제목 아래에서, 영화가 끝까지 들려주려 한 것은 결국 한 가지였다. 지워진 기억을 붙드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 시대의 진짜 비밀 요원이 해야 할 임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