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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나홍진 스페셜 ② 추격자 — 잡아도 풀려나는 세계, 그리고 카뮈가 말한 부조리

by Life philosophy 2026. 7. 6.

나홍진 감독 스페셜의 두 번째로, 그가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린 작품을 꺼낸다. 추격자다. 2008년에 나온 이 데뷔작은 한국 스릴러의 판도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전과 이후가 나뉜다고 할 만큼, 이 영화가 보여준 밀도와 긴장은 충격적이었다.

지난번 황해를 다룰 때, 그 영화가 법과 질서가 사라진 자연 상태를 그린다고 적었다. 추격자는 그와 정반대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의 세계에는 분명히 법이 있고, 경찰이 있고, 시스템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범인을 두 손으로 붙잡아 경찰서에 넘겼는데도, 그 시스템이 그를 풀어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죽어간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 법이 무력해서 벌어지는 그 비극. 추격자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그 견딜 수 없는 무력함이다.

영화 추격자 포스터

잡았는데, 풀려난다

영화의 주인공 엄중호는 전직 형사 출신으로, 지금은 출장 안마소를 운영하는 포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기 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처음에는 그저 여자들이 도망친 줄 알았던 그는, 사라진 여자들이 모두 한 남자에게 불려간 뒤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돈 문제로 시작된 그의 추적이, 한 연쇄살인마를 쫓는 필사의 추격으로 변해간다.

엄중호는 결국 그 남자를 붙잡는다. 지영민이라는 이름의 그 살인마를 두 손으로 잡아 경찰에 넘긴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의 진짜 악몽이 시작된다. 지영민은 자기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지만, 물증이 없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고, 자백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 결국 법의 절차는 그를 풀어준다. 명백한 살인마가, 자백까지 한 살인마가, 시스템의 빈틈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절박한 사실이 남는다. 지영민에게 마지막으로 끌려간 여자 미진이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영화의 후반부는 이미 풀려난 살인마와, 그가 어딘가에 가둬둔 채 죽어가고 있을지 모를 한 여자, 그리고 그녀를 찾아 미친 듯이 뛰는 엄중호의 시간 싸움이 된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

이 영화의 세계를 들여다보다가, 한 명의 철학자가 떠오른다. 알베르 카뮈다. 예전에 월드워Z를 보고 카뮈의 페스트를 빌려 적은 글에서 그의 사상을 한 번 다룬 적이 있는데, 추격자는 카뮈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부조리(absurdité)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정리한 부조리는 이런 것이다. 인간은 세계가 의미 있고, 정의롭고, 이해 가능한 곳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노력하면 결과가 따르고, 악이 벌을 받고, 애쓰면 보상받는 세계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그런 인간의 기대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세계는 무심하고, 부조리하며, 우리의 간절한 바람 앞에서 침묵한다. 카뮈는 이 인간의 기대와 세계의 무심함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부조리라 불렀다.

추격자가 그리는 세계가 정확히 그 부조리다. 엄중호는 자기 두 손으로 살인마를 잡았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마땅한 순간이다. 그런데 세계는 그 정의로운 기대에 응답하지 않는다.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시스템은 살인마를 풀어준다. 엄중호가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아무리 필사적으로 뛰어도, 세계는 그의 노력에 정당한 결과로 응답하지 않는다. 그 견딜 수 없는 간극, 인간의 정의로운 의지와 세계의 무심한 침묵 사이의 그 간극이 이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의미 없는 악, 지영민

이 부조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지영민이다. 하정우가 연기한 이 살인마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의 살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원한도, 이득도, 어떤 거창한 동기도 없다. 그는 그저 죽인다. 취조실에서 자기 범행을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는, 우리가 악에게 기대하는 어떤 서사도 없다. 왜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사실상 없다.

카뮈는 이런 무의미한 악을 일찍이 그려낸 바 있다. 그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특별한 이유 없이 한 사람을 죽인다. 재판에서 그가 내놓는 살인의 이유는 그저 태양이 눈부셨다는 것뿐이다. 카뮈가 보여주려 한 것은, 악이 반드시 이해 가능한 동기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세계가 부조리하듯, 악 또한 부조리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지영민이 그토록 공포스러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악에게서 이유를 찾고 싶어 하지만, 지영민의 악에는 그 이유가 없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 부조리하게 존재하는 악 그 자체다.

그럼에도 뛰는 엄중호

그런데 추격자가 단순히 부조리한 세계의 절망만을 그리는 영화였다면, 이토록 오래 마음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진짜 힘은 그 부조리 앞에서 엄중호가 보이는 태도에 있다.

엄중호는 세계가 자기 노력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뛰기를 멈추지 않는다. 시스템이 살인마를 풀어줬어도, 미진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가능성 앞에서도, 그는 끝까지 그녀를 찾아 뛴다. 그 달리기에 성공의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미 늦었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런데도 그는 뛴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답으로 내놓은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시지프의 신화로 설명했다. 신들에게 벌을 받아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닿는 순간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져 영원히 그 헛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 카뮈는 그 무의미한 반복 앞에서도 시지프가 바위를 계속 밀어 올리는 그 행위 자체에서,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반항(révolte)을 보았다. 세계가 무의미해도, 그 무의미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밀어 올리는 것. 그것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인간이 자기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엄중호의 그 미친 듯한 달리기가 바로 시지프의 그 반항이다. 세계는 그의 노력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뛴다고 해서 미진이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 부조리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끝까지 뛴다. 그 달리기 자체가, 무의미한 세계를 향한 한 인간의 반항이다. 추격자가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깊은 울림을 남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법이 있어도 무력한 세계

지난번 다룬 황해와 나란히 놓고 보면 나홍진 감독의 세계가 더 또렷해진다. 황해가 법과 질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를 그렸다면, 추격자는 법과 시스템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이 무력하게 작동하는 세계를 그린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에 닿는다. 인간을 지켜줘야 할 그 무엇이 부재하거나 무력할 때,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저항하는가.

나홍진 감독은 데뷔작에서부터 이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세계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부조리하고, 무심하고, 정의가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냉혹한 세계 한가운데에서, 끝까지 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인간을 세워둔다. 추격자의 엄중호가 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세계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 인간의 반항이, 이 데뷔작을 한국 스릴러의 한 이정표로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나홍진 감독이 그 부조리를 신과 믿음의 영역까지 밀어붙인 작품, 곡성을 꺼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