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20 서울의 봄 — 1979년 12월의 그 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오랜만에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를 보았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 한밤중에 한국 현대사의 한 큰 흐름이 결정적으로 굳어지던 그 풍경을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안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영화를 보기 전부터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그런데 영화는 그 분명한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미 닫혀 있는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질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1979년 12월의 그 한밤영화의 무대는 1979년 12월 12일의 밤이.. 2026. 6. 9. 하얼빈 — 안중근의 그릇, 그리고 맹자가 말한 대장부 오랜만에 한국 사극을 봤다. 그것도 안중근이라는,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한 영웅의 이야기다. 현빈이 안중근 역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막상 영화를 본 뒤에는 그 캐스팅이 정말 잘 어울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일어난 그 결정적인 한 발의 총성도 아니었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어떤 액션 장면도 아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비추는 한 장면, 그러니까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는 그 짧은 한 결정이었다.신아산의 전투, 그리고 한 사람의 결정영화 초반에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 2026. 6. 7. 내 이름은 영화 후기와 폴 리쾨르의 기억과 망각으로 본 잃어버린 이름 2026년 4월에 개봉한 〈내 이름은〉은 정지영 감독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영화이자, 9,778명의 시민이 직접 후원해 시작된 작품이다. 제7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었고, 우디네 극동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영화는 촌스러운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1998년 봄의 열여덟 살 아들 영옥(신우빈)과, 여덟 살 이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채 살아온 그의 어머니 정순(염혜란)의 두 시간을 천천히 교차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관에서 직접 본 감상과 함께,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의 '기억과 망각' 개념을 빌려 영화가 들려주는 한 가지 약속을 들여다보려 한다.1. 롯데시네마 서수원에서 본 내 이름은 영화 후기롯데시네마 서수원에서 〈내 이름은〉을 봤다. 평.. 2026. 5. 13. 만약에 우리 영화 후기와 키르케고르의 반복과 회상으로 본 첫사랑 한국 영화 〈만약에 우리〉는 2018년 중국에서 큰 사랑을 받은 〈먼 훗날 우리(后来的我们)〉를 한국 정서로 다시 옮긴 리메이크다. 명절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청춘이 사랑에 빠지고, 함께 가난한 시절을 지나며 점점 어긋나다 결국 서로를 놓아주는 이야기를 그린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이 그 시절을 돌아보며 "만약 그때 우리가…"라는 가정을 끝없이 던지는 동안, 영화는 한 가지 질문을 가만히 던져둔다. 우리 인생은 어떤 회상의 자리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가. 이 글에서는 직접 본 감상과 함께,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반복과 회상' 개념을 빌려 영화가 남기는 여운을 들여다보려 한다.1. 롯데시네마 서수원점에서 혼자 본 만약에 우리 영화 후기평일 저.. 2026. 5. 7. 용감한 시민 영화 후기와 방관자 효과로 본 학교폭력의 진짜 가해자 2023년 10월 개봉한 〈용감한 시민〉은 신혜선과 이준영이 주연을 맡고 박진표 감독이 연출한 액션 코미디 영화다.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정교사 승진을 앞두고 모든 불의를 못 본 척하던 기간제 교사 소시민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학생 한수강의 학교폭력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무거운 주제를 만화적 톤으로 풀어 전반적으로 가볍게 즐기기 좋은 작품이지만, 영화 내내 반복되는 한 문장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OTT로 본 가벼운 감상과 함께, 사회심리학의 고전 이론인 방관자 효과로 영화의 진짜 메시지를 짚어보려 한다.1. Wavve로 본 용감한 시민 영화 후기평소에 좋아하는 신혜선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 하나로 Wavve에.. 2026. 5. 4. 세계의 주인 영화 후기와 칼 융 그림자로 본 가면 너머의 감정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2025년 한 해 가장 입소문이 무성했던 한국 독립영화다. 토론토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 영화 최초로 초청되었고, 핑야오국제영화제에서는 2관왕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건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무스포 챌린지'다. 윤 감독이 시사회 자리에서 직접 자필 편지를 통해 줄거리를 미리 알리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부탁했고, 봉준호·연상호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그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응원의 행렬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영화의 구체적인 사건은 다루지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고 가장 깊이 머문 한 가지 감정,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 안에 묻어둔 진짜 사이의 거리'를 분석심리학자 칼 융의 시선으로 풀어보려 한다.1. OTT로 만난.. 2026. 5. 4.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