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16 타짜를 스무 번 넘게 봤다 — 고니의 자유, 그리고 파스칼이 말한 인생이라는 내기 같은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짜가 나에게 그런 영화다. 정확히 몇 번을 봤는지 이제는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고, 웬만한 대사는 그냥 줄줄 외운다.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도 지금 어떤 장면이 지나가고 있는지 다 안다. 최동훈 감독의 여러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짜는 단연 으뜸의 자리에 있다.언젠가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가. 처음 떠오른 답은 단순했다. 도박으로 돈을 따는 그 짜릿함, 화투패가 뒤집히는 한 순간에 분출되는 도파민. 분명히 그 재미가 영화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스무 번을 넘게 보면서 그 답은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내가 이 영화를 이토록 오래 곁에 두는 진짜 이유는 도박의 짜릿함이 아니라.. 2026. 6. 13. 전지적 독자 시점 — 원작을 모르고 본 한 관객의 호평, 그리고 야우스의 기대 지평 가끔 평론과 분명히 다른 결로 한 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있다. 모두가 별로라고 입을 모으는 영화가 한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들어오는 경우. 전지적 독자 시점이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8억 뷰의 웹소설 원작이고, 거대한 팬덤이 있었고, 그래서 영화화 소식부터 기대와 우려가 컸던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오자 평단도 원작 팬도 거의 한목소리로 실망을 토로했다. 평점이 떨어지고, 후기마다 각색의 어색함과 CG의 미흡함이 지적되었다.그런데 나는 의외로 재미있게 봤다.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원작 웹소설도 웹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펼쳐지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 채로, 그저 한 편의 한국 판타지 액션 영화를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다.. 2026. 6. 10. 서울의 봄 — 1979년 12월의 그 밤, 그리고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오랜만에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를 보았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 한밤중에 한국 현대사의 한 큰 흐름이 결정적으로 굳어지던 그 풍경을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안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영화를 보기 전부터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한국이 어떤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그런데 영화는 그 분명한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이미 닫혀 있는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질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1979년 12월의 그 한밤영화의 무대는 1979년 12월 12일의 밤이.. 2026. 6. 9. 하얼빈 — 안중근의 그릇, 그리고 맹자가 말한 대장부 오랜만에 한국 사극을 봤다. 그것도 안중근이라는,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한 영웅의 이야기다. 현빈이 안중근 역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막상 영화를 본 뒤에는 그 캐스팅이 정말 잘 어울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일어난 그 결정적인 한 발의 총성도 아니었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어떤 액션 장면도 아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비추는 한 장면, 그러니까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는 그 짧은 한 결정이었다.신아산의 전투, 그리고 한 사람의 결정영화 초반에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 2026. 6. 7. 내 이름은 영화 후기와 폴 리쾨르의 기억과 망각으로 본 잃어버린 이름 2026년 4월에 개봉한 〈내 이름은〉은 정지영 감독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영화이자, 9,778명의 시민이 직접 후원해 시작된 작품이다. 제7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었고, 우디네 극동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영화는 촌스러운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1998년 봄의 열여덟 살 아들 영옥(신우빈)과, 여덟 살 이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채 살아온 그의 어머니 정순(염혜란)의 두 시간을 천천히 교차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관에서 직접 본 감상과 함께,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의 '기억과 망각' 개념을 빌려 영화가 들려주는 한 가지 약속을 들여다보려 한다.1. 롯데시네마 서수원에서 본 내 이름은 영화 후기롯데시네마 서수원에서 〈내 이름은〉을 봤다. 평.. 2026. 5. 13. 만약에 우리 영화 후기와 키르케고르의 반복과 회상으로 본 첫사랑 한국 영화 〈만약에 우리〉는 2018년 중국에서 큰 사랑을 받은 〈먼 훗날 우리(后来的我们)〉를 한국 정서로 다시 옮긴 리메이크다. 명절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청춘이 사랑에 빠지고, 함께 가난한 시절을 지나며 점점 어긋나다 결국 서로를 놓아주는 이야기를 그린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이 그 시절을 돌아보며 "만약 그때 우리가…"라는 가정을 끝없이 던지는 동안, 영화는 한 가지 질문을 가만히 던져둔다. 우리 인생은 어떤 회상의 자리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가. 이 글에서는 직접 본 감상과 함께,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반복과 회상' 개념을 빌려 영화가 남기는 여운을 들여다보려 한다.1. 롯데시네마 서수원점에서 혼자 본 만약에 우리 영화 후기평일 저.. 2026. 5. 7.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