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20 베테랑 — 어이가 없네, 그리고 호네트가 말한 무시와 인정투쟁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믿고 본다고 예전에 한 번 적은 적이 있다. 베테랑은 그 믿음의 가장 단단한 토대가 된 영화다. 1340만 명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그러니까 한국 사람 넷 중 하나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그 숫자가 이미 한 가지를 말해준다. 이 영화에는 그 많은 사람의 가슴을 동시에 건드린 한 가지가 분명히 들어 있다.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저 통쾌함이라고 생각했다. 안하무인의 재벌 3세가 끝내 형사의 손에 잡히는 그 사이다 같은 결말.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조금 달랐다. 베테랑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단순한 권선징악의 통쾌함이 아니라, 그 통쾌함 밑에 깔린 한 가지 더 깊은 감정에 있었다. 무시당한 자의 분노다. 조태오와 서도철, .. 2026. 6. 17. 군체 — 가장 신선한 좀비, 그리고 뒤르켐이 말한 집합의식 금요일이었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나와 안산 CGV의 17시 30분 회차를 예매해두고, 평소처럼 혼자 영화관에 앉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를 보러 가는 길이었고, 솔직히 기대가 적지 않았다.기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이라는 한 편의 영화로 한국 좀비물의 새 장을 연 사람이다. 그 이후의 작품들이 부산행만큼의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번 군체는 소재 자체가 분명히 신선했다. 좀비들이 서로 연동되어 정보를 교류하고, 그 교류를 통해 실시간으로 진화한다는 설정. 대장 좀비가 다른 좀비들을 조종한다는 그 발상. 기존 좀비물의 문법을 한 번 비트는 이 컨셉만으로도 영화관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한 가지 묘한 감정이 남.. 2026. 6. 15. 공작 — 흑금성이라는 가면, 그리고 고프먼이 말한 무대 위의 자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묘한 무게를 가진다.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한 인물의 선택이 실제로 누군가가 살아낸 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등 뒤에서 가만히 따라온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 그런 영화다.이 영화는 1990년대 중후반, 흑금성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북에 침투했던 한 실존 안기부 요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 고위층에 접근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핵 개발 정보에 다가가는 한 남자. 총격도 격투도 거의 없는 이 조용한 첩보 영화가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유는, 그 모든 긴장이 오직 한 가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가면이다. 한 인간이 자기 진짜 얼굴을 완벽하게 숨긴 채 다른 한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는 그 끝없는 긴장.흑금성이라는 가면공작의 주.. 2026. 6. 15. 휴민트 — 적과 동지의 경계, 그리고 슈미트를 넘어서는 한 줄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일단 믿고 보는 편이다. 베테랑도 밀수도 모가디슈도, 그가 만든 영화에는 한국 상업 영화의 한 정점이라 할 만한 단단함이 있다. 휴민트도 그런 마음으로 눌렀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그 날, 별 정보 없이 그저 류승완이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영화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차가운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첩보전, 맨몸 격투와 총격과 자동차 추격이 빈틈없이 이어지는 그 리듬은 분명히 류승완다웠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그 화려한 액션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 한 도시에 모여든 네 사람,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려지는 한 가지 경계였다.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라는 그 경계.블라디보스토크.. 2026. 6. 14. 타짜를 스무 번 넘게 봤다 — 고니의 자유, 그리고 파스칼이 말한 인생이라는 내기 같은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짜가 나에게 그런 영화다. 정확히 몇 번을 봤는지 이제는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고, 웬만한 대사는 그냥 줄줄 외운다.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도 지금 어떤 장면이 지나가고 있는지 다 안다. 최동훈 감독의 여러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짜는 단연 으뜸의 자리에 있다.언젠가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가. 처음 떠오른 답은 단순했다. 도박으로 돈을 따는 그 짜릿함, 화투패가 뒤집히는 한 순간에 분출되는 도파민. 분명히 그 재미가 영화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스무 번을 넘게 보면서 그 답은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내가 이 영화를 이토록 오래 곁에 두는 진짜 이유는 도박의 짜릿함이 아니라.. 2026. 6. 13. 전지적 독자 시점 — 원작을 모르고 본 한 관객의 호평, 그리고 야우스의 기대 지평 가끔 평론과 분명히 다른 결로 한 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있다. 모두가 별로라고 입을 모으는 영화가 한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들어오는 경우. 전지적 독자 시점이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8억 뷰의 웹소설 원작이고, 거대한 팬덤이 있었고, 그래서 영화화 소식부터 기대와 우려가 컸던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오자 평단도 원작 팬도 거의 한목소리로 실망을 토로했다. 평점이 떨어지고, 후기마다 각색의 어색함과 CG의 미흡함이 지적되었다.그런데 나는 의외로 재미있게 봤다.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원작 웹소설도 웹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펼쳐지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 채로, 그저 한 편의 한국 판타지 액션 영화를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앉았다.. 2026. 6. 10. 이전 1 2 3 4 다음